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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봉녀 Aug 20. 2021

오르막길 보다, 평지가 좋은
'걷기 중독'

#2. 내가 걷는 이유

걷는 걸 좋아하지만 등산은 선뜻 내키지 않는다. 

평지는 발목이 버티는 동안 끝없이 걸을 자신이 있지만 산에 오르는 건 정말이지 망설여진다.  

걷고 싶은 마음은 늘 동하지만 등산에 대한 욕구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렇다고 산을 외면하는 건 아니다. 


'둘레길만 걷자'는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엉겁결에 산 정상을 찍을 때도 있다. 겨울 새벽 한파를 뚫고 혼자 한라산 백록담까지 주파하는 '등산파' 친구의 꼬임 덕분에 서울 근교 몇몇 산의 정상도 밟아봤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느냐고 구시렁대면서도 일단 산에 가면 기어코 정상은 찍는다. 물론 연중행사 수준이지만.  


걷는 친구들은 때때로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오르막길을 싫어하느냐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높아가는 심장 박동수, 점차 빨라지는 박동 덕에 마구 요동치는 아드레날린, 급기야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짜릿함, 그렇게 다다른 정상에서 맛보는 쾌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숨이 덜 차는,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 상태가 좋다.  



 

오르막길보다 평지를 선호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내 성향의 발로이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신체적인 고통을 동반한 빠른 성취보다 별달리 고통을 자각하지 않는 선에서 차근차근 가는 게 편하다. 시간도 체력도 훨씬 더 걸리는 지구력의 싸움이고, 결과에 다다르지 못할 확률 역시 높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게 편하다. 


평지를 선호하는 건 목표를 정하는 데 서투르고, 목표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맞는 즉흥성을 따르는 나의 또 다른 성향의 발로이기도하다. 꼭 목표를 두지 않고 천천히 걷다 보면 의외로 다양한 선택지를 만난다. 


가능성을 동반한 선택지, 설렘을 유발하는 선택지, 불가능해 보이지만 왠지 끌리는 선택지가 공존한다.   


 목표한 대로 나의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즈음은 이제 아는 나이가 됐다. 


나름 '전문직'이라고 불리는 직업을 갖게 됐을 때에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나와 제법 어울리는 직업이고, 좋아하고 원하던 일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이 직업으로 일하고 싶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회사에서도, 일하면서 만난 외부의 파트너들도 일정 부분 나의 실력을 인정해줬기에 자신감까지 차곡차곡 쌓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막 오르던 시기였다. 저 위에 내가 원하는 게 기다리고 있다고, 정상에 다다르면 남들과 다른 성취감을 얻을 거라고 믿었다. 올라도 올라도 또 다른 정상이 나타나고, 중간도 가지 못하고 내려와야 하는 변수가 지뢰처럼 곳곳에 숨어있다는 걸 몰랐고 사실 예상하지도 못했다.



나는 오래 걷고 싶다. 


오래 생각하고, 오래 일하고, 오래 이야기하고, 오래 공감하고, 오래 같이 웃고 싶다. 그러려면 오르막길보다 평지여야 한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면서 얻는 성취를 결코 무시하거나 그 가치를 간과해서가 아니다.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속도로, 내 삶을 채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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