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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봉녀 Aug 16. 2021

족저근막염 직전의 ‘걷기 중독’

#1. 내가 걷는 이유

니체가 말했던가. 걷는 자를 이길 순 없다고.


꼭 누군가를 이기고 싶어서 시작한 걷기는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게 그저 좋았고, 기회가 닿으면 걷으려 했다. 누구나 하는, 딱 그 정도의 걷기였다.


신기하게도, 사표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발동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걷기였다. 누군가 추천한 일도 아니었고, 걸으면 뭔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를 갖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왠지 그냥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신발장엔 운동화가 한가득인데도 나이키 러닝화까지 한 켤레 장만해 그날부터 무작정 걸었다.


어느 날은 6~7km를 걸었고 또 어느 날에는 10km를 걷다가 그것도 모자라 20km를 주파한 날도 여럿이다. 정해진 곳은 없다. 한강도 걷고, 집 근처 동네 골목을 구석구석 걷고, 간혹 여유가 생기면 제주도의 바닷길도 걸었다. 보통 10km씩 걷곤 한다. 걸을 땐 구글맵을 켤 필요도 없었다. 어떤 길이든 또 다른 길과 연결돼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떤 길이든 종착점은 있으니까.


본류의 길이 없어지면 반드시 샛길이 나타났고, 목적지가 멀게만 보이면 어김없이 지름길을 발견했다.
걷다가 무릎이 아프다 싶을 땐 잠시 쉬어갈 만한 카페가 꼭 눈에 들어왔고,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 곳을 걸을 때에도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였다.
때때로 갈림길과 마주칠 때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작은 스릴도 맛봤다.

길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어느 길을 걷느냐는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다.


걷기의 최대 미학을 꼽으라면 단연코 '혼자 걷기'라고 답한다. 혼자 걷다 보면 누구나 '사유가'가 될 수 있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서 나누는 깊은 대화와 마음의 공감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혼자 걸으면서 겹겹이 쌓는 생각과 생각을 다지는 과정은 그동안 몰랐던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 같았다.



회사를 관두려고 마음먹은 뒤 나에겐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절실했던 건 '용기'가 아닌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어떠한 '계기'였다. 그것은 어쩌면 두려움에 기인한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하나의 직업으로 20년 가까이 지낸 나의 삶을, 잠시만 멈추고 싶었지만 그게 또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서 발동한 캄캄한 두려움이었다.


기다림도 필요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럴 때면 나는 걷고 또 걸었다.


한창 걷는 나날들에서 만난, 한 미술작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군요."  

자아도취형 인간이란 뜻인가 싶어,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고민을 해결하려고, 결심을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는 많아요. 그런데 당신처럼 '걷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수긍하고 넘겼지만, 난 그때 알았다. 그 미술작가 역시 삶의 전환을 겪어본 사람이라고, 그리고 걷기가 낳는 사유의 힘을 경험해본 이 라고.


'자발적 백수'가 된 후로도 나의 걷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출퇴근의 압박이 없으니
 아침, 낮, 오후, 밤, 정해둔 시간도 없이 걷고 걷는다.
 누군가로부터 떠밀린 게 아닌데도, 문득문득 내 처지가 답답해질 때면
 당장 운동화부터 꺼내 신는다.


그렇게 나선 길에는 늘 '사람'이 있다.


아침엔 걷기보다 주로 뛰는 외국인들을 만나고, 낮에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떼는 어르신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장바구니를 들거나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다양한 세대의 엄마들을 만나고, 저녁엔 애플워치 차고 힘차게 걷는 에너자이저들을 만난다. 길게, 오래 걷다 보니 찾아오는 불청객도 있다. 요즘 발목 언저리가 저릿한 걸 보니 아무래도 족저근막염 근처까지 온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다. 그래도 일단 걷는다.  


걷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 하나. 누구나 자신의 '뇌 용량'에 새삼 놀라게 될 터. 까맣게 잊었다고 여긴 옛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당황스러울 때가 있고, 갑자기 의욕이 충만해져 자신감이 용솟음칠 때도 있다.


그러니 일단 걸어보라고, 한 번쯤 꼭 혼자서도 걸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걷다가 힘들면 멈추면 되고, 갈림길이 나오면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면 된다. 목적지가 너무 멀게 느껴질 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지름길을 발견하는 행운도 만나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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