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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봉녀 Aug 15. 2021

'월급루팡', 그 단어의 섬뜩한 부메랑

고령화 사회보다 빨리, 회사가 '고령화' 될 때...

10년 전쯤인가. '월급루팡'이란 단어를, 그 책에서 처음 보았다.


매년 연말이면 새해의 트렌드를 전망한다는 포부 아래 각종 마케팅 전략을 적절히 깔아 놓는 책에서다. 출간 초기만 해도 과연 몇 년이나 유지될까 싶었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이젠 꽤 단단한 독자층을 구축해 연말이면 어김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바로 그 책에서였다.


새해에 주목할 만한 신조어를 소개하는 목차에서 처음 목격한 '월급루팡'이란 단어. 뜻풀이를 읽다가 손뼉을 쳤다.  이야기가 아니었다. 회사의  자리에 앉아 당장 고개를 돌리면... 저쪽에 '월급루팡' 보이는 것만 같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도적 '루팡' 월급도둑에 붙이다니. 너무나 신박한 단어라며 동료들과 낄낄댔던 기억도 선명하다.


그땐 웃었지만, 몇 년 뒤엔 웃을 수 없었다. 주변에 '월급루팡'은 자꾸 늘어났지만, 회사의 동력이라 할 만한 신입들은 말 그대로 '씨가 말라' 버렸으니까.



사회가 급격히 고령화되어 간다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는 그 속도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저마다의 포부를 갖고 입사해 (업무 특성상) 매일매일 앞만 보고 질주해야 하는 일을 몇 년씩 하다 보면 어느새 에너지는 고갈되고 말았다. 옆도 보고, 한 번쯤 뒤도 돌아봐야 하는데 하루하루 숨 가쁜 일상에서 주변을 점검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내가 어디쯤 서 있나' 고개를 들었을 땐 사방이 모호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흔히 '슬럼프'라고 불리는 '자각 타임'은 2~3년을 주기로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렇게 몇 번의 주기가 흘렀을까. 회사 조직 곳곳을 채우고 있던 신입사원이나 연차가 낮은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연봉이 더 높은 동종업계로 떠났고, 같이 일하는 상사와의 마찰로 떠났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떠났고, 간혹 출산과 육아를 해결하지 못해 떠났다.


희한한 상황은 그다음부터 도드라졌다. 그들이 떠나는 사이에도, 수년 째 '월급루팡'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자리를 지켰다. 단 한 명의 이탈도 없이. 실무를 맡아야 할 직원들의 수는 급격히 줄고, 부서를 이끄는 관리자나 임원만 빠르게 늘어나는... 그야말로 역피라미드의 기형적인 구조가 돼 버렸다.


그제야 나는 '월급루팡'이란 단어가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상징 언어'가 아닌, 곧 나에게 닥칠지 모를 '현실 언어'가 될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회사가 고령화되면서 나타나는 문제는 나열하기도 벅차다.



첫 째. 휴가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장 내 일을 맡아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편하게 연차 써'라는 상사의 지시는, 가뜩이나 차오를 대로 차오른 화만 돋을 뿐.


둘째. 다른 업무를 맡아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당장 일할 사람이 빠듯하니 익숙한 일만 맡게 된다. 인사이동은 불가능에 가깝고 대부분 부서마다 부서장이 바뀔 일도 거의 없다. 같은 업무, 같은 사람, 같은 울타리에서 맴돌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월급 지옥에 빠질 수 있다는 뜻.


셋째. 가장 심각한 문제. 고령화는 곧 고연차를 의미한다. 그것은 조직 내에서 연봉이 높은 직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의미다. 고연차 고연봉 직원의 많으니 회사에선 임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자연히 그 피해는 신입이나 낮은 연차의 직원들에게 돌아온다. 심지어 불경기를 이유로 연봉이 몇 년째 동결되고 있다면 그 박탈감은 심각한 수준.  


그러니 '월급루팡'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신선함이 더 이상 내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월급루팡에 가까워지는 건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래도 나는 월급값 그 이상 하잖아'라는 자신감, '이렇게 일하는 데도 월급이 이 정도야?'라는 불만이 혼재돼 그 자리를 채웠다.  


고령화 사회보다 더 빨리 고령화되는 한 회사에서 보낸 몇 년의 시간이 남긴 '섬뜩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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