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우로부터 '배우다'
두 곳의 회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우들을 만났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인터뷰를 했고, 많을 땐 하루에 두 명의 배우와 만나 두 번의 인터뷰를 한 날도 있다.
그쯤 되면 인터뷰를 하는 행위가 누군가를 만나 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삶을 이해하는 수준에 매번 미치지 못하리라는 건 예상 가능한 일. 무릇 인터뷰라는 것이 서로의 목적이나 필요, 바람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자리이니 그에 부합하는 결과에만 도달하면 된다고도 여겼다.
고백하건대 아주 가끔은 기계적으로 인터뷰에 임할 때도 있었다. 언제나 진심으로 대하려 했지만 그게 또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대개 특정 시기에 많은 배우들로부터 인터뷰 제안이 쏟아질 때 그랬다. 상호 약속 아래 인터뷰 자리에 마주 앉아놓고도 그야말로 '진'을 쏙 빼놓는 배우들을 만날 때엔 더더욱 그랬다. 간혹 방어적인 태도가 너무 강한 이들에겐 '욱'하고 오기까지 발동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경우는 그저 귀여운 수준이다.
물론 대다수 인터뷰는 나를 긍정적으로 자극시켰다. 숱한 배우들이 자신의 일에 얼마나 열정적인지를 엿보는 기회였고, 지금 누리는 인기와 명성을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해하는지를 알았고, 그럼에도 자신의 일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음도 느꼈다.
셀 수 없이 많은 배우와 만나 전부 복기할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 말을 전부 기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대화도 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 배우와 처음 만나 가진 첫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닮고 싶은 사람만 멘토는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은 닮으면 안 되겠구나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런 사람도 다른 의미의 멘토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20대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세상을 남들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한 편의 주연 영화를 완성하고 그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선배 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워낙 탁월해 여기저기서 호평이 쏟아지던 참이었다. 멘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우리가 아는 그 멘토의 정의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서 해석했다. 함께 연기한 선배 배우로부터 얻은 조언이라고 했지만, 그 조언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건 그였다.
기억력이 썩 좋지 않은 내가 무려 10년 전 그 배우의 말을 또렷이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그의 말은 내게 여전히 각인돼 있다. 시의 적절한 순간마다 상기돼 내 마음의 중심도 잡게 해 줬다.
'회사 경력'이 쌓이다 보면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지만 대개 조직 안에서는 비슷한 인간형이 나타난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얌체형, 후배들의 성과를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는 안면몰수형, 공동 작업이 주어졌는데도 모르는 척 밑의 직원들에 떠넘기는 모르쇠형, 오직 회사 고위직에만 충성하는 직진형까지. 드물지만 인본주의를 실천하다가 윗사람들에게 찍히는 대책 없는 휴머니즘형도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겐 얌체형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직진형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평가는 내가 아닌 상대방이 몫이니 적절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나를 포함해 회사 곳곳을 채운 여러 인간군상을 바라볼 때면 나는 늘 오래전 그 배우의 '띵언'을 떠올리곤 했다.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았고, 혹여 내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닮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온전한 나만의 숙제로 남았다. 여전히 풀지 못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그런 숙제로 말이다.
그 배우와는 이후로도 간혹 만났다. 주연 영화를 내놓을 때면 인터뷰 자리에서, 혹은 해외에서 열린 영화제에서였다. 닮고 싶지 않은 멘토의 정의를 일찌감치 내릴 수 있던 그 탁월한 선구안 덕분인지,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신인 배우들을 만나다 보면 내놓는 공통된 모범답안이 있다. '배우는, 배우는 직업이기에 배우'라고. 처음 그 이야길 들었을 때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딘 초년생들의 의욕 넘치는 각오로만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숱한 배우들과의 만남은 나에게도 적지 않은 배움을 줬다. 2011년 영화 '완득이'의 주인공으로 만난 배우 유아인이 내게 멘토의 정의를 새롭게 일깨운 것처럼, 이후로도 여러 배우가 '배우로부터 배우는' 경험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