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여행의 기획과 감독은 내가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여정을 정하고 숙박할 곳을 결정하는데 급급해서, 어디서 뭘 볼지는 이동 중에 발길 닿는 대로 정하는 내 맘대로의 여행이 되고 있다.
여행의 방법은 이렇다. 일단 지도(구글맵 등)를 본다. 거쳐가야 할 도시들을 찍어두고 이동 중이나 1시간 정도의 주행으로 갈만한 곳이 있는지 주욱 훑어본다.
그렇게 어떤 장소가 레이더에 포착되면 지도를 크게 확대해서, 주변에 뭐가 볼만한 지 체크한다. 요즘은 맵에 명승지나 경관이 수려한 곳이 친절히 표시가 되어 있고, 심지어 360도 파노라마 뷰로 해당 장소를 볼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해 올린 리뷰와 사진들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최첨단 정보 기술을 활용한 JIT(just-in-time) 트래블 플래닝이라 자신(?)할 수 있다. 다음 목적지로의 이동 루트에 있던 Carcassone을 찾게 된 건 이번 여행의 작은 성과이다.
중세 배경의 영화의 전투 장면에서나 볼 법한 견고하고 웅장한 성벽이 특징인 이 요새 도시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https://www.tourism-carcassonne.co.uk/discover/carcassonne-history 참고)
이베리아 반도와 서유럽 지역의 접경에 속한 지역의 특성상, 중세시대에 이 지역에 있었던 치열한 영토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슬람 세력인 사라센 인들이 이곳을 통치하고 있었을 당시(8세기 중)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왕 샤를마뉴 대제는 이 천연의 요새를 빼앗기 위해 5년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전사한 남편이자 성주의 뒤를 이어 Carcass라는 이름의 여귀족이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긴 공방전으로 인해 성 안의 식량은 떨어져 갔다. 그녀는 지혜를 짜내어 남아 있던 곡식을 돼지에게 먹이고서 성벽 밖으로 던졌다. 떨어져 죽은 돼지의 배에 있던 많은 곡식을 본 대제는 성 안의 물자가 풍부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결국 철수를 결정한다. 퇴각하는 군대를 바라보며 Carcass는 승리의 종을 울렸다.
Sonne!(프랑스어로 종을 울린다는 뜻)
그 후, 샤를마뉴와의 평화 조약을 맺고 봉건제의 한 축으로 역할을 다 하게 되며, 번영을 누렸다.
이 성은 경제적 영광과 함께 가톨릭의 종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Catharism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결국 십자군 시대를 맞으며 이단세력으로 몰려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종교의 이름 아래 하루 밤 새 7000명이 넘는 교인들과 아이들, 여자들까지 살해되었다. 현재 도시 안에 있는 고문 박물관(Museum of the Inquisition)에서 그 시대 신의 이름으로 실행된(신은 원하지 않았을) 탄압의 잔인함을 볼 수 있다. (참고로 구글 평점은 매우 낮고, 아이들은 절대 가면 안될 곳이라 한다)
역설적으로 이곳은 17세기 프랑크-스페인의 영토 분쟁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속하게 되고 지역의 평화가 찾아오자 급속히 중요성을 잃어버리며 쇠락해버렸다. 그 후 19세기 들어서, Viollet-le-Duc이라는 유명 건축가의 힘으로 재건되었다. 멀리는 로마시대부터 중세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온 도시의 역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평가되어 90년대부터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뚤르즈에 아직 떼제베(TGV)가 닿지 않기에, 접근성이 좋지 않아 파리 근처(라곤 해도 차로 3시간이지만)의 몽 셸 미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들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고백하자면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공부하고 관광했다면 더욱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Carcass 여공의 사진도 더욱 자세히 찍었을 거다. 나중에 보니 이렇게 쪼그맣게 나온 사진이 다다.
성 안의 마을로 들어가 본다. 길 양쪽엔 눈길을 끄는 작은 가게들로 가득하다. 아기자기하기도 하지만 묘하게 중세풍의 섬뜩함도 있다.
뚤르즈에서 미처 들르지 못하고 지나왔던 Graine de pastel지점도 눈에 들어온다. Pastel이라는 푸른빛을 내는 꽃으로 만든 화장품으로 진정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좀 더 발라보고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는데, 빨리 나오라는 세 사람의 성화로 제대로 못 보고 나온 게 못내 아쉽다.
성문 앞에서 출발하는 꼬마기차(어른 7유로/어린이 3.5유로)를 타 보았다. 하지만 성벽 바깥쪽만 도는 데다 속도도 느리고, 설명도 잘 들리지 않아 영 불만족스러웠다. 시간을 들여 바깥쪽 성곽을 따라 걸으며 멋진 포인트들을 찾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 언덕에 지어진 요새인 만큼 주변의 탁 트인 들판의 광경이 감탄스럽다.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성곽은 보수의 과정을 거쳤다고 하지만, 천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들이 해쳐지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 돌들을 만져보며 과거에 여기서 얼마나 치열하고 잔인한 전투가 벌어졌던 걸까 궁금해진다.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상화된 모습들이다. 실제의 전쟁은 멋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성을 포위해 주민들을 아사상태 직전까지 몰고 가고, 종교적 이견을 죽음으로 묵살시키고, 생각을 바꾸기 위해 고문을 서슴지 않았던 잔인한 역사를 하나의 스토리로 바꾸고, 거기에 시간이란 포장지를 곱게 덮으면 현재 수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장소가 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JIT여행 계획으로 찾은 성과, 까르까손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 Octon 옥똔으로 다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