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앙티브와 깐느, 그 사이에서

by 제이와이

니스에서 가까운 두 도시 Antibes(앙티브)와 Cannes(칸느, 깐느)를 다녀왔다. 너무도 다른 색의 두 도시를 만나고 온 하루의 경험.


게으름뱅이 여행자인 우리는 늘어지게 아침잠을 잔 후 점심을 먹을 겸 느지막이 앙티브로 향했다.


... 바다는 어린 시절 좋아하던 마노와 옥수처럼 신비로운 빛깔이었다. 녹색 우유 같았고, 빨래를 헹군 파란 물 같았고, 짙은 와인 같았다. 문밖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지나고, 시골 작은 술집의 포도덩굴 뒤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기계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코르니슈 도르에서 방향을 틀어 나무들이 줄줄이 녹색으로 겹쳐 늘어선 채 어두워져 가는 비탈을 통과하여 고스의 호텔로 내려갈 때는 폐허가 된 수도교 위에 달이 이미 떠올라 있었다......
-F.S. 피츠제럴드 <밤은 부드러워라> 중-


피츠제럴드는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 마르세유와 이탈리아 국경 사이의 어느 곳쯤에 위치한 해변의 호텔을 배경으로 소설 <밤은 부드러워라>를 시작한다. 어린 장미꽃 같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로즈메리’의 시선으로 쓰인 소설의 1부처럼, 앙티브는 싱그럽게 자라난 여름의 나무 같다. 이곳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진 않지만 아직은 세상사에 통달하진 않은, 이제야 막 자신의 욕구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 처녀의 모습을 그려내기에 최적의 배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IMG_6046.jpg


대관람차 그랑루(Grande roue)를 뒤로 하고 견고한 요새 Bastion Saint-Jaume를 따라 걸었다. 포트 보벙(port vauban)에 선착된 (아마도) 비싸고 화려한 요트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어느덧 시야가 탁 트여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서 스페인의 조각가 Jaume Plensa가 설치한 방랑자(Nomade, 2007)가 있다.


여러 문양이 투각 된 거대하고 하얀 조각상의 안에 들어가 다시 하늘을 보니 마치 내가 구름 속에 들어가 하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작품과 함께 방랑자가 되어(사실 이미 노매드이지만) 그가 보는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 바다 위로 터너의 그림처럼 구름이 덮치고 있다.


불안해 보이던 구름이 한차례 지나가는 비를 뿌렸다. 가족 모두 포트 보벙의 아치 아래 몸을 잠시 피했다. 아마 선원들에게도 이런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진 공간 아닐까 싶게 네 가족+한 마리 모두 들어올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비가 지나가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새침 떠는 해가 반짝 떴다.


방랑자로부터 다시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 전혀 해수욕을 할 생각이 없어 준비 없이 나왔기에 아름다운 해변 Plage de la Gravette을 만났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IMG_6075.jpg
IMG_6061.jpg
IMG_6079.jpg

유리알 같은 맑은 바다와 백사장, 아담한 크기와 욕조의 물같이 잔잔한 파도. 아이들은 그 안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발목까지만 담그겠다고 하더니, 이내 무릎, 허벅지 차는 곳까지 들어가 물놀이를 한다. 깊지 않은 수심, 그리고 니스의 해변과 달리 고운 모래를 만질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곳이다. 물에 젖지 마ㅡ를 얘기하던 나도 할 수 없이 아이들 노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조금 더 걸어 올라가, 앙티브를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그리말디 성(Château Grimaldi)엔, 흔쾌히 그 이름을 버리고 세워진 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 이 있다. 피카소에게 그가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되었던 이 고성엔 그가 이곳에서 그려낸 작품들이 기증되었다고 한다. 방문하진 않았지만, 그가 1946년 가을 이곳에 머무르며 걸어 내려가고 가볍게 스낵을 즐기고 지인과 이야기 나누었을, 소박하고 평화로운 뒷골목을 보고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도 내려다보았을 코발트블루빛 바다.



조개가 푸짐히 들어간 파스타와 야채, 올리브, 참치, 계란이 아낌없이 담긴 니쓰와즈 샐러드로 식사를 했다. 여유가 되면 수영 도구를 챙겨 다시 오자 약속하고 이곳 해변에 아쉬움을 남긴 채, 깐느로 간다.


무슨 일인지 구글맵이 깐느로 가는 길을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안내를 했다. 게다가 이 길도 생각지 않게 정체가 심했다. 운전하는 사람은 짜증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고, 조수석의 나는 약간의 멀미에 시달리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그렇게 깐느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줄지어선 명품 상점과 화려한 카지노와 클럽이 있는 곳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그와는 달랐다. 시내 곳곳엔 무장한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맵에는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나오는 길도 통제되어 돌아 나가야 했다. 그리고 왜 교통체증이 있었는지 이해하게 해주는 수많은 인파들... 지금은,



IMG_5926.JPG
IMG_5938.JPG


깐느 영화제 기간이었던 것이다! 원래 5월에 있었어야 할 영화제가 코비드로 시기가 밀려 7월에 개막했던 것. 전혀 기대도 정보도 관심도 없이 온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밀려, 갈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일단 숨을 돌려야 할 것 같아 들른 현지 한식당에서 얻은 몇 가지 정보론, 이번 영화제엔 봉준호 감독이 오프닝을, 송강호 배우가 심사위원을, 이병헌 배우가 시상자로 나오는데, 봉 감독님은 며칠 전 오픈 행사만 하고 베니스 영화제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로 가셨다고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송 배우나 이 배우 둘 중 한 명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남편은 되려 본인을 그 사람들로 헷갈릴 거라는데, 송 배우 쪽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영화배우들과 감독들의 핸드프린트가 있는 Palais des festivals는 그 유명한 깐느 영화제의 레드카펫이 깔려 있고 접근할 수 없었다. 안에서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지, 출연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과 기자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다. 평범한 관광객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험적인 복장을 한 사람들, 색색가지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사람들, 마치 누군가의 무도회에 가기 위해 한껏 치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동화 <까마귀의 깃털>에 나오는 무지갯빛 깃털로 치장한 까마귀처럼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어색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영화인들이 모이는 큰 축제이다 보니, 이곳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있는 것은 아닐까란 어설픈 추측만 할 뿐이다.


IMG_6100.JPG
IMG_6115.JPG


어찌 되었든 우연히(!) 큰 축제에 기분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었다. 물론 시사회나 레드카펫 행사는 못 보겠지만, 해변에서 벌어지는 문화 공연은 누구나에게 오픈되어 있다. 분홍빛으로 저물어가는 해안이 매혹적이다. 기타 연주에 맞춘 열정적인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뜨근해지고 달뜬 기분을 안고 한 여름밤의 꿈같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맑고 검은 밤이었다. 흐릿한 별 하나에 걸린 바구니 안에 밤이 쏙 들어와 있는 듯했다...(중략)... 번갈아 가며 길게 늘어선 짙은 어둠과 옅은 밤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여 마침내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몇 번을 급강하하다가 몸집이 커다란 고스의 호텔에 이르렀다.
-F.S. 피츠제럴드 <밤은 부드러워라> 중-


낮의 고요함을 담은 도시와, 생동하는 밤의 도시를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듯 다녀왔다. 아마도 앙티브를 한번 더 방문하게 되겠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반갑게 맞아준 깐느에게도 고마움을 보내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