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 니스의 푸른 밤

by 제이와이

Côte d'Azur (코트다쥐르)

프랑스의 남동부, 지중해를 면하는 해변을 일컫는 명칭이다. 스페인어의 azul(아술)이 파랑을 의미하는 단어니, azur 역시 푸른빛을 띠는 이 지역의 별명일 거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의 열광적인 성화에 부응할 겸, 코트다쥐르의 중심, 니스의 해변을 마음껏 즐길 예정이다.



완만하고 긴 아치형의 해변엔 그로부터 뻗어나간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바다를 바라다보며 지어진 하얀 건물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집들의 잘 보존된 이탈리안식 창들이 도시에 풍부한 색감과 함께 고풍스러움을 더해 준다. 백사장은 적지만 바다가 둥글게 빚어낸 돌로 이루어진 해안이 보다 깔끔한(?) 해수욕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십 수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가 기억났다. 호기심에 누드비치를 찾았을 때였다. 흡사 마트 생선코너 얼음 위의 번들거리며 가지런히 누워있는 생선들처럼, 발 디딜 틈바구니도 없이 자리를 펴고 누워있던 사람들 사이, 수영복 상의를 못내 벗어던져지지 못하고 쭈뼛쭈뼛 거리고 있던 두 명의 여행객이 있었다...


지금의 니스는 코비드의 여파로 인해 백배는 한적한 모습이다. 희고 푸르게 부서지는 파도가 신선한 아름다운 해변. 신기하게도 이곳에선 우리가 소위 ‘바다 냄새’라고 부르는 짠기 어린 비릿한 향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물이 깨끗한 것일까? 아님 사라진 관광객들로부터 자연이 얻어낸 소득일까.


아이들은 물고기가 보인다며 물안경을 쓰고 입수하며 신이 났다. 코코와 함께 앉아 하늘, 바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 사이에 스물넷 언저리의 어설픈 나로 다시 돌아가 있다.


2005년 7월, 해변의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두 명의 여행객은 여차저차 니스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이런! 파리로 돌아갈 기차가 없다는 쇼킹한 뉴스가 전해졌다. 친구와 난 당장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급히 주변 숙소를 찾아보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같은 상황인지라, 숙소는 없고 가격은 몇 배로 올랐다. 돈은 지금도 없지만 그땐 더더욱 돈이 없는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기에 여행경비는 한 푼이 아까웠다. 하지만 역 구탱이에 앉아 머리를 짜내 봐야 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비슷한 사정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우리 또래 남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위기가 깡을 만들어 낸 걸까? 친구가 그랬는지 내가 그런 건지, 무슨 용기로 같이 숙소를 하나 잡자고 제안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들과 하룻밤(!)을 한 숙소에 있는다니...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웠던 그날, 역에 숙박 호객 행위하러 나온 아저씨를 따라 졸레졸레 따라간 숙소는 방 하나에 거실 하나 작은 아파트였다. 7명의 남녀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이 영 마뜩잖다.


그제야 가슴이 쿵덕쿵덕, 뭔가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란 걱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7명의 젊은 남녀는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잘 보내고 쿨하게 제 갈길 갔다는 싱거운 이야기. 걔네도 그랬지만, 우리도 어지간히 별 일 생기기엔 평범한 사람들이었던가보다. 제주도의 푸른 밤, 아니 니스의 푸른 밤 같은 건 누군가에게나 찾아오는 일은 아니다.


떠올려 보니 입가에 슬쩍 웃음이 머금어진다.

그때의 동행자 친구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추억을 나눌 상대와 무사히 연락이 닿는다는 게 소소하게 기쁘다.


나 지금 니스에 있어ㅡ옛날 생각난다


거기가 역에 불나서 하루 급히 모르는 사람들이랑 잔 데였지? 우리 진짜 생각해보면 용감했(?) 던 것도 같고.. 무식했(?) 던 것도 같고.. 그냥 젊었나


열차 파업이었는지 뭐였는지. 진짜 그때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게 용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게 말여.. 요즘 같음 위험한 짓이라고 당장에 생각하고 차라리 밖에 사람 많은데 찾아 밤샜을 거 같은데ㅎㅎ 우리도 사람 의심할 줄 몰랐고 걔들도 그랬던 거 같고. 다 젊었네


젊고 아니 아니 심지어 어렸다.


추억에서 깨어나 다시 지금의 니스로 돌아왔다. 어느덧 20대를 훌쩍 넘어 30대의 끝 자락에 서 있는 내가 순간 낯설다. 내 마음은 아직 저 멀리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물리적 시간과 내가 인지하는 시간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늘 낯설고 늘 조금, 서글프다.


어떤 분의 인상적인 의견이 생각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리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가 늦춰질 거라는 의견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난 열심히 시간을 늦춰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간을 내 인생에 좀 더 오래 가져가기 위해서, 별 수 없이 놓쳐버리지 않도록. 다행히 이번엔 동행자가 세명, 아니 세명에 한 마리나 있으니 좀 더 쉽지 않을까?


다시 한번 푸른 바다와 하늘을 한껏 눈에 담아본다. 저릿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때의 쭈뼛거렸던 어설픈 나와 지금의 내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의를 쿨하게 벗어던지지 못하는 그때의 내가 지금 여기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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