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지도자의 윤리의식.

by 이현성

어느 조직에나 부조리와 부패는 존재한다. 체육계도 그중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들도 당장 문제만 없다면 요직에 쉽게 오르고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사는 듯 보인다. 제자와 성 추문에 휩싸여도 상습적으로 폭행을 일삼아도 떳떳하게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다면 못 그럴 것 같은데도 말이다. 먹고사는 것이 이렇게나 복잡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조직의 특성에 따른 문제인지 아님 개인의 문제인지 궁금해진다. 어느 한쪽의 문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어떤 부분이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 인지에 대한 그 무게를 판단해 볼 필요는 있다.


첫째로 조직의 특성이라고 가정해보자. 선배 세대들 시절부터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내려온 부당함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20년 전에는 공금을 개인적으로 쓰기도 하고, 해외 전지훈련에서 불법으로 영수증 처리를 하는 것들. 그렇게 가로챈 훈련비용으로 그 당시에 몇 천만 원을 챙겼다는 등 마치 그때가 호시절이었고 당시에 이득을 취한 사람들의 일화를 신화처럼 여긴다.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잘못이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위와 같은 선배 세대들의 부조리를 근거 삼아 현재 자기 실수에 면죄부를 준다. "20년 전에는 더한 것도 했는 지금 이 공금 카드로 음료수 몇 잔 사 먹는 게 뭐 대수라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목적으로 음료수 몇 잔 마신 게 몇 천만 원을 호주머니로 슬쩍한 것보다 윤리적으로 더 성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20년 전이었다면 당신도 그 음료수가 아니라 몇천만 원을 횡령했을 사람이다. 단지 예전에는 몇천만 원을 가로채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대수롭지 않았던 것일 뿐. 부패의 정도는 시대마다 개인의 잘못을 어디까지 수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저널리스트 권석천 씨의 <사람에 대한 예의> 란 책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바라건대,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p.16>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했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비록 지금 당신이 도덕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말이다. 책의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스스로를 믿지 말라는 저자의 의견은 불편하다. 쉽게 말해 '너도 미숙하고 나 또한 별다르지 않으니 남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지 말라는 것' 아닌가. 그것은 당신 또한 살면서 한 번쯤은 윤리적인 가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환경이 사람을 억압하고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주변 환경이 주는 압력이 한 개인으로서는 때로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면 당장 내가 죽으니 잘못된 걸 알아도 시류에 편승하고 양심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부패와 부조리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은 남 탓으로 이어지며 결국 아무 개선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개인의 문제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잘못된 것을 알고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뭘 몰라서 실수하는 것. 무엇이 더 나쁜지 재는 것 자체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그로 인해 썩어가는 주변과 자신이 속한 환경을 나락으로 모는 것은 매한가지 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반대로 개인의 문제라고 가정해보자. 문제를 주변이 아닌 나 자신에서 찾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그렇다. 사회의 부조리를 얘기하는 것은 쉽지만,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이나 커다란 조직은 내가 당장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최소한 내가 이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나의 도덕성을 침범하는 주변의 유혹을 걸러낼 수 있는 윤리의식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점점 윤리적으로 성숙하고 있다. 저명한 회의론자이자 스켑틱의 발행인인 마이클 셔머는 그의 책 <도덕의 궤적>에서 이렇게 묻고 설명한다.

도덕은 진보하는 것일까? 도덕을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으로 설정하고, 진보를 '더 나은 상태나 조건으로의 진전'으로 설정한다면 인류는 분명 도덕적으로 과거보다 더 나은 상태에 다다랐다. 도덕은 '우리 안'의 인간 본성의 일부로 존재하며, 이런 사실에서 도덕 과학이라는 경험 과학을 세울 수 있다. 도덕 과학은 도덕의 영향권을 확장하고 도덕적 진보를 가속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들을 이성과 과학의 도구들을 써서 알아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p.24>


그러니까 인간의 도덕성은 점차 성숙하고 그 궤적이 선형을 이루고 있으며, 점점 윤리적 바탕이 탄탄한 사회가 살아남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는 윤리적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는 것은 사회에 기여하는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능까지 해당된다. 윤리의식은 지능의 영역으로 들어온 지 오래다. 결국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윤리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라고 뭐 대단한가 라고 자문했을 때 나 또한 도덕적으로 성인군자 같은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범법까지는 아니더라도 권석천 작가의 말처럼 한 발자국 잘 못 디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수 도 있다. 동시에 윤리적으로 비열한 선택을 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마음 한편으로는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이 윤리적 가치를 거스르고 사는 것이 나에게도 그럴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윤리적 가치는 숭고히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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