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것은 그냥 싫다고 하자.
체육계에서 늘 꼬리표처럼 달려있는 체벌, 폭력 및 성폭력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까? 도제식 교육에 기반한 대한민국 교육은 스포츠계에서 조차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의 기저는 수직적인 방향으로 작동한다. 친구 같은 스승, 친구 같은 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자와 선수가 이와 같은 상하 프레임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말이다.
대한민국은 고작 1년 2년 차이의 선 후배 관계도 위계적으로 작동한다. 체육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호칭을 없애고 서구 문화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이 떠오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남을 부르기가 너무 힘든 문화라고 하는 것에 공감했다. 예를 들면 처음 만나는 사람의 나이와 직업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섞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과 동생, 스승과 제자, 그리고 직장동료 등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한번 형성되면, 관계구조 자체가 특정한 영역 안으로 위축된다. 스승과 제자는 형 동생이 되기 쉽지 않으며 스승과 제자는 직장동료로서 서로를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이처럼 관계를 제한하는 호칭 문화는 점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체육계도 바뀌면 좋을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예전에 어떤 한국 축구선수는 소속된 유럽팀에서는 골을 잘 넣는데 자국 대표팀 경기에서는 경기력이 부진한 이유가 선배한테 패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한국인은 이미 호칭으로 인한 서열구조에 의해 귀속되며 이로 인해 특정 영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며 살아오고 있다. 대한민국 문화에서는 호칭의 위계가 오랫동안 우리의 언어체계와 관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당장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바꾼다고 해서 수직 관계구조가 갑자기 수평으로 눕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호칭문화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 세대가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보긴 어렵다. 몇 세대는 걸러야 한다.
그렇다면 엘리트 체육인들은 이러한 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부당함을 최대한 덜 겪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관계에 두지 않고 오롯이 자신에게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관계 속에서의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안다. 팀 스포츠이던 개인 스포츠이던, 선수는 자신이 속한 그룹을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는 것을 말이다.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그리고 프로팀의 그룹 안에서 선수 정체성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물론 이러한 소속감이 선수로서 자존감을 높여주거나 경기력에 유의미한 효과를 불러올 수 있겠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원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특히 지도자와의 관계를 너무 중요히 생각하게 되면, 지도자의 지나치게 부당한 요구나 체벌에 저항하기 어렵다.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라 할지라도, 선생님이 시키니까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스승님을 좋아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기꺼이 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지시나 요구가 자신의 양심을 찌른다면, 그 관계에 금이 가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점점 타락한다.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으로 작은 것을 묻어둔다면, 다음번에는 더 큰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젖듯 양심을 거스르는 경험이 쌓이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은 더 심각해지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은 점점 더 약해지기 때문이다.
수 없는 부당한 요구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선수에겐 여전히 스승으로부터 기대할 만한 것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도력 하나는 있으니까.", "몇몇 안 좋은 행동들 빼고는 괜찮으니까." "다른 코치보다는 그나마 덜 폭력적이니까.."와 같은 것 말이다. 아니면 이와 같은 부당함을 참지 않으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나 또한 선수 시절 관계의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한 관계 속에서 미안한 감정,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저항하지 못했던 적 도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치러야 하는 대가가 적을 때 맞서야 한다. 이미 매몰된 물질적 정신적 비용이 아무리 크다한들, 부당한 대우와 자신과 맞지 않는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세심히 들여다 보고 양심과 맞지 않는 일이라면 제 아무리 스승이라는 호칭을 부르는 사람에게라도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단 번에 저항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연습해야 한다. 어쩌면 선수로서의 자아와 더불어 다양한 정체성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선수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아들, 딸로서 말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진 후에야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미지 출처: M이코노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