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준비하는 숲

봄이 오는 흔적을 살피다

by 푸른 숲

이곳에서는 삼월인데도 눈이 쌓여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늘이 길었던 언덕엔 여전히 하얀 눈이 녹았다가 얼었다가 한다. 겨우내 빈 가지로 하늘을 향했던 나무들 또한 여전히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하다. 계곡엔 겨우내 단단해진 얼음이 그대로 지난 겨울을 보관하고 있다.


따뜻한 계절의 숲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오간데 없고 사방은 고요하다. 보드라운 흙속을 누비던 두더지도, 잣이며 도토리를 모으며 부산하던 다람쥐도

어디 숨었을까. 먼 데서 작은 산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여전히 겨울인 것만 같은 삼월의 숲. 봄이 오고 있는 걸까?


여전히 겨울인 숲에서 나는 증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숲을 천천히 걸으며 감각을 열고 봄이 오는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적어도 한두 가지는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삼월의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색이 짙어진다.

증거 1. 나무의 색이 짙어졌다. 눈과 바람과 짧은 햇살을 묵묵히 견디던 나무의 거칠거칠한 나무의 껍질 아래로 한결 진해진 결들이 보인다. 물을 잔뜩 끌어올리며 새로운 잎들을 만들 준비를 하는 것일까. 색이 짙어진 나무 곁에 가니 향기로운 나무 냄새 또한 진해졌다. 나무를 만지니 손으로 전해지는 생동감이 봄에 대한 기대를 조용히 끌어올린다.


눈이 녹고 냇물이 흐른다.

증거 2. 곧 사라질 눈더미 옆으로 시리고 여린 물들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소란스럽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흘러간다. 그 소리가 경쾌하여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냇물이 흘러가며 계곡의 눈들을 녹이고, 얼음을 녹이며 봄을 부지런히 불러온다. 삼월의 숲에서 경쾌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이건 필시 봄이 오는 소리다.


숲길이 폭신폭신하다

증거 3. 겨우내 얼어서 단단해졌던 흙들이 조금씩 녹아가며 숲길이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워진다. 이 곳의 숲은 잣나무가 많아 녹은 흙 위로 잣잎이 카펫처럼 내려있다. 부드러운 잣나무 카펫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부드러운 느낌이 발끝에서 어깨까지 올라온다. 이렇게 부드러운 땅을 밟을 수 있는 건 삼월의 숲에 봄이 오기 때문이리라.



숲의 바위를 덮은 이끼들의 초록빛이 선명해진다


증거 4. 숲 속의 바위에 터를 잡은 이끼들의 초록빛이 선명해졌다. 얼었던 계곡의 물들이 녹고, 조금씩 길어지는 해의 영향인 걸까. 적당한 습기와 적당한 햇빛으로 삼월이 되면서 이끼의 초록빛이 선명해진 듯하다. 이끼의 광합성은 썹씨 25도, 해가 뜨거나 질 때의 밝기에 활발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이 숲의 초록 나뭇잎이 번지기 시작할 때 이끼 또한 활발히 번성할 것이다.



노란 꽃. 지쳐보이지만 빛을 잃지 않았다.

증거 5. 말라있는 덤불 사이로 뒤늦게 피어 노란빛을 안고 겨울을 난 꽃을 보았다. 늦게 피었지만 이 정도의 쌀쌀함은 이길 수 있다고 말을 거는 꽃을 보니 불어오는 바람 속에 몇 가닥은 부드러운 봄바람이 실려오는 것 같다. 그 작은 부드러운 훈풍이 늦게 핀 꽃의 색을 지켜준 걸까. 물론 하루의 대부분은 고되겠지만 쉽게 빛을 잃고 말라가지 않은 꽃이 아름답다.



캠핑장의 빈 데크들이 적막하다


아직 눈이 곳곳에 남아있던 삼월의 숲이지만 조금씩 봄이 오고 있었다. 슬쩍 보면 봄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봄이 오고 있는 현장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봄”인가 보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다. 길었던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이 오는데 어찌 한 번에 짠 하고 봄으로 바뀌겠나.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면서 그렇게 봄이 오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푸른 신록의 바다를 마주하는 “아주 봄날”이 올 것이다.


봄이 오는 증거를 찾으며 숲을 걷다 보니 추억이 깃든 데크들을 만났다. 겨울 동안 눈과 바람과 잣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들을 들으며 잘 지냈던 빈 데크들. 언젠가는 캠퍼의 발걸음이 다시 이어지겠지.



잎으로 무성할 봄을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앙상한 자작나무의 하얀 가지들을 보며 잎으로 무성할 “아주 봄날”을 상상한다. 저 하얀 가지들에서 하나둘씩 잎이 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여러 잎들이 올라와 초록 지붕이 만들어져 파란 하늘을 적당히 가릴정도가 되겠지. 그 사이 봄비도 내려 숲의 향기는 더욱 진해질 테고. 봄바람에 나뭇잎이 아주 기분 좋게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새들이 분주하게 오갈 테지. 봄을 상상하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산책의 마무리는 카푸치노 같은 맥주 한 잔



아직 겨울인 삼월의 숲을 돌고 나오니 곧 다가올 봄이 나를 따라 나온다. 봄이 오는 증거 몇 가지를 발견하고 나니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한 것만 같다. 중요한 일을 하고 났으니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기로 한다. 카푸치노 같은 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긴 산책 뒤에 까만 밤이 내리는 걸 기다릴 작정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걸었음에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길어진 해와 천천히 맞이하게 될 저녁 또한 봄이 오는 증거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