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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by 조태진

방금 한 방송사의 저녁뉴스를 다 보고 티브이를 껐습니다. 하지만 제 눈앞엔 어느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 한 명이 이제 갓 태어나 신생아 보호실에 누워 있던 어느 신생아의 두 발을 거꾸로 잡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cctv 화면의 영상이 좀처럼 눈앞에서 떠나지 않고 흐릿하게 떠 다니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 간호사가 어린 신생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이유를 뉴스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간의 어처구니없는 유사한 범죄의 내용을 바탕으로 어쩌면 그 아이가 성가시고 귀에 거슬리게 울어서 또는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그 아이만 보면 재수 없고 기분이 나빠져서인지도 모릅니다. 계속되는 뉴스의 영상과 보도를 보니 그 아이는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인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엄마의 전적인 돌봄을 통해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왠지 맥락이 끊기는 느낌이지만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과 그로 인한 기괴하고 잔인한 행동 때문이었는데 심한 경악을 동반한 이 의문을 처음 가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어느 일요일 낮에 본,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노예 검투사들이 칼 같은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영화 속 노예 검투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그것도 굉장히 잔인하다고 느끼고 있던 중에 한 검투사가 다른 검투사를 제압한 뒤 로마의 황제 시저에게 패배한 검투사를 어떻게 할지 시선으로 묻자 시저는 관객석에 앉아서 검투를 관람하고 있던 로마 시민들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고 로마 시민들을 엄지 손가락들 땅바닥으로 향하게 하여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자 저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놀란 가슴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어랄 때 저는 인간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인간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자신에게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좀 더 가까운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가 들면서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갉아먹는 현실 속의 사례들을 점점 더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인간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배운 성선설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는데 아주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그럼 인간들은 타인의 선의와 배려를 왜 갈망하고 죄책감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생기기도 해서 심적인 고통을 받는 것을 성악설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악감을 동반한 이런 혼란스러움을 누그러뜨린 계기는 어느 대학 동기가 대학교 1학년 2학기 말경에 읽어 보라고 추천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본능에 충실한, 달리 말해서 본능의 구속으로부터 거의 또는 전혀 자유롭지 못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어느 정도 본능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태어나서 인간에게 고유한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자연과의 원시적 결연관계를 잃게 되어서 거대한 세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확실할 뿐 아니라 적절하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찾지 못해서 불안과 무기력감에 시달리는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런 운명적인 불안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이 처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이런 선천적인 모순, 즉 한계가 뚜렷한 인간의 불안과 무기력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주 작아 보이고 시시해 보일지라도 개인성과 독자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가치관과 관심사를 공유한 다른 사람들과 느슨한 연대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술적인 방법, 에리히 프롬의 표현을 빌자면 신경증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불안과 무력감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에는 타인을 내 손아귀에 넣고 지배함으로써 불안과 무력감을 없애고자 하는 사디즘과 나는 전혀 가치 없는 존재여서 개인적이고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다라는 신념(?)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자신을 심하게 비하함으로써 불안과 무기력감이 초래하는 혼란과 긴장감을 잠재우려고 하는 마조히즘적 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신경증적 태도의 배후에는 인간이 제거할 수 없는 실존적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데 그 방법은 개인의 독자성과 개성을 포기하고 남의 존재를 통해서 불안과 무기력감을 잠재우려는 악순환적인 헛된 시도입니다.


방금 저는 악순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이유는 그런 신경증적인 방법은 마치 마약의 성질과도 같아서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운명적인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끝도 없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헛된 시도의 강도가 증가할 뿐 아니라 성질도 점점 더 악성으로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병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윤리적 내용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생명력을 잃어서 무미건조해지거나 자기변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합리화로 그 빛을 잃기도 하는데 글 처음에 언급한 간호사가 "갓난아이에게 가해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뇌출혈을 일으키진 않았다"라고 늘어놓은 궁색한 합리화가 그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이 합리화를 조금 분석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발생한 부정할 수 없는 뇌출혈은 과연 왜 생긴 것일까? 다른 원인이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지요.


이런 기괴하고 경악할 만한 행동을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간호사의 범죄는 cctv에 고스란히 녹화되고 따라서 그 간호사는 그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 해고될 뿐만 아니라 법에 의해 오랫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드는 의문은 과연 그 간호사는 그런 부정적인 결과들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흔한 표현으로 잠시 귀신에 들린 것처럼 그런 부정적인 결과들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는 자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라는 의문 말이지요. 저는 그 어떤 비합리적이고 기괴한 행동의 배후에도 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이나 이유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그래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황당한 결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그가 왜 그런 비합리적인, 즉 자신에게 막대한 심리적 물질적 손해를 초래할 것이 뻔한 행동을 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행동의 이유를 아하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라도 그런 나쁜 행동에 공감할 순 없을 텐데 옛 속담애 "핑계(이유) 없는 무덤 없다"라고 했듯이 어떤 행동에도 그 행동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쁜 행동에도 배후엔 그 나쁜 행동을 일으킨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이때 조심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은 마음과 행동 간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돌기 몇 년 전 예전에 사람의 마음애 대한 책을 써서 인지도가 꽤나 높아진 어느 정신과 의사가 사이코 드라마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즉흥적으로 연출하는 사이코 드라마를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느 사이코 드라마처럼 그도 사이코 드라마를 보러 온 관객들 중에서 그날의 연극 주인공을 뽑았는데 그날의 주인공은 이제 얼굴애 드러난 주름살을 감출 수 없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였습니다.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장식이나 소품도 없는 강당 앞 의자에 앉은 그 아주머니는 자기 남편에 대한 속상한 이야기를 꺼냈고 이야기가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같이 속상해하고 같이 화가 나게 할 즈음 그 아주머니는 깜짝 놀랄만한 은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건 어느 날 밤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의 코와 입에 베개를 덮어 눌러서 질식시켜 죽이려고 하다가 문득 "내가 자금 무슨 마친 짓을 하려고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마터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나쁜 행동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말 이전에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 자기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잘 들었기에 그 아주머니가 남편을 죽여 버라고 싶다는 "마음"만은 충분히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었지만 하마터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행동을 순간적인 판단 때문에 멈췄다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전에 머리와 가슴을 분리해서 보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마음"이란 개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아주머니가 옆에서 자고 았던 남편을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은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 때문이기보다는 오랫동안 속을 무척이나 썩이긴 했자만 오래전 한때 손만 잡아도 가슴이 뛰고 얼굴색이 발그레지게 만들었던 남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우 만약 그 아주머니가 실제로 남편을 살해했더라도 그저 구차한 핑계나 변명이 아니러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정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도 그 마음이 아니라 억제할 수도 삼갈 수도 있었던, 게다가 미봉책이어서 초라해 보일지라도 현실 속에서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저질러 버린 범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타까운 상황은 아니어도 나쁜 짓에는 변명이나 핑계라고 보기 힘든 아유들이 배후에 있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때 그 마음에는 공감하더라도 사람에게 또 다른 마음, 이를테면 "이건 옳자 못한 짓이다, 아무라 마음으로 마워도,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생각과 판단으로 일어나는 다른 마음도 존재하기 때문에 바록 사정은 좀 딱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상황을 참작한 합당한 감형을 동반한) 그에 응당한 법적 처벌을 내려야만 인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마음을 좀 더 잘 표현하고 동사에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짤막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오래전에 대낮에 인질극을 벌이다가 결국 붙잡힌 어느 탈주범이 "유전무죄 유전무죄"라고 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해 보이는 세태를 비꼬기도 했는데 저는 그의 말을 충분히 마음으로 이해할 순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대낮애 벌인 인질극까지 공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글을 맺으면서 질문 하나를 드립니다. 과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일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거두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은 자연이 낳은 변종으로서 선천적인 괴물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인간들은 구제불능이니 자연이 허락한 수명 안에서 내 이익만 앞세우면서 상스러운 표현을 빌자면 "인생 x. 또, " 하며 그저 놀고먹고 즐기다가 가면 그만인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요? 그에 대해 제 의견을 짧게 말하자면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마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중 한 가지만을 골라서 살려고 발버둥 친다면 인간의 본성상 둘 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낱 인간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용기를 내서 불안과 무기력함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으로 인정하면서 조금 더 행복해지려고, 가능하다면 내가 포함된 "우리"가 조금은 더 행복해지려고 특별할 것 별로 없는 일상의 연속 속에서 힘을 내서 애써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행복이란 길을 걷다가 쌀쌀한 날씨 때문에 뜨뜻한 국물이 생각났는데 앞을 살펴보니 마침 길 한켠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을 파는 노점상이 있는 걸 발견하고 드는 반가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적어도 "일상 속의 행복"이라고 표현한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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