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호수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여행 친구를 사귀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좁은 방을 함께 쓰며 오래된 친구처럼 하하호호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함께 으쌰 으쌰 힘내자며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은 이런 것들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외향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어느 호스텔이든 홀로 지낸 시간보다는 새로운 친구들에 둘러싸여 복작복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먼저 다가와준 적극적인 친구들 덕분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옆자리를 채워주었다. 이곳에서도 또다시 나는 운 좋게 긴 여정을 함께 해줄 친구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 캐나다에서 왔고 올해 스무한 살이다. 그녀는 나보다 어리지만 배낭여행에 있어서는 베테랑이다. 이제껏 혼자 여행 온 여자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기에 속으로 무척 놀랐다. 키가 큰 그녀는 언뜻 보기에 성숙해 보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직 앳된 얼굴이 많이 남아 있어 '혼자 여행하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혼자 소파에 앉아 69 호수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안녕? 너도 69 호수로 가?"
"응."
"그럼 같이 갈래?"
"좋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짝이 되었다.
하나와 통성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지프차가 호스텔 앞에 도착했다. 다들 어디에 있었는지 열 명 정도의 무리가 한 차에 올라탔다. 대부분이 동료가 있어 만약 하나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면 민망할 정도로 들뜬 분위기의 차 안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한 청년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하나는 나에게 '여행을 해보니까 사람들이 보통 이스라엘 사람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라며 귀띔해주었다. 그 이유가 시끄럽고 무례한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저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 역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다들 원래 알던 사이인지 하나와 나처럼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나 역시 하나와 딱 붙어 나란히 앉아있는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에 알게 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지에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혼자 남미까지 온 여행자라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커다란 공통부분을 나누었으니까.
남미까지 온 사람들은 옆 동네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대부분은). 그 무거운 발걸음 중 한 지점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기에 충분하다. 버스가 하루만 늦게 도착하더라도 혹은 일찍 도착하더라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라는 것, 다른 호스텔에 묵었더라면, 만약 하나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더라면, 한국사람은 시끄럽고 무례하다는 평이 있었더라면 등 경우의 수를 덧붙이자면 끝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건 무의미해지는 거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만났고 같은 지점을 향하는 한 함께 가는 동료가 된다.
안데스 산맥은 지구상에서 가장 길게 뻗어있는 산맥이다. 베네수엘라부터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7개국에 걸쳐 형성되어있다. 페루는 중앙 안데스에 속하는데 오늘은 69 호수를 내일은 낄까우안카를 트레킹 한다. 어쩌다 보니 낄카우안카까지 하나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녀 역시 호스텔 주인의 꾐에 넘어간 게 틀림없다.
하늘은 푸르르고 하얀 구름이 여유롭게 두둥실 떠다닌다.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날씨다. 한쪽에는 강이 졸졸졸 흐르며 말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심드렁한 표정으로 풀을 뜯어먹는다. 그러한 여유로운 정경에 왠지 나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을 것만 같다.
하나와 나는 말수가 적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함께 보폭을 맞추며 호수까지 올라갔다. 이따금 서로의 안부를 물어봐주고 뒤돌아 위치를 확인하면서. 나란히 걸을 때도 있고 멀찍이 떨어졌을 때도 있지만 시야에서 벗어날 정도로 거리를 두진 않았다.
그렇게 산책하듯 천천히 산을 오르니 어느새 설산 사이에 자리 잡은 69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는 사파이어를 녹여서 차갑게 식힌 듯 푸른빛과 녹색 빛이 그러데이션으로 촤르르 펼쳐졌다. 이곳에 몸을 푹 담그고 나오면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이 아름다웠고, 금방이라도 호수 수면 위로 낯선 생물체가 큰 소리를 내며 튀어나올 것 같이 신비롭기도 했다. 아주 유순한 거대 생명체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문득 오래전 호수 괴물이라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뉴스가 생각났다. 누군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피규어로 사기를 친 것이다.
하지만 이 호수에서는 정말 그런 생물체 하나쯤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고 수줍음이 많은 생명체인 거지.
여행의 매일이 기억할 만큼 특별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장기여행에서는 일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남미의 자연경관을 바라볼 때면 여행이 무척이나 특별해지고, 그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 역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멋진 순간들을 끊임없이 두 눈에 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