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딘다는 것
잠이 덜 깬 비몽사몽 한 눈으로 모니터를 확인했을 때 비행기는 어느새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먼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수십 번도 더 한 질문. 늘 그렇듯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 막연함도 만성이 되어 익숙하다. 나는 애써 답하지 않기로 했다. 창밖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새하얀 구름이 가득 메워져 있다.
새벽 일찍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해준 아빠와 포옹을 할 때도, 공항에서 비행기 시간을 함께 기다려준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힘 찬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그들이 사라지고 혼자 공항에 남았을 때 어쩐지 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던 가슴도 맥없이 꺼져버렸다. 또다시 나의 고질병이 돋은 것이다.
남미 여행을 떠나기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했던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본 남부의 아름다운 절벽 마을 포지타노와 에메랄드 빛 아말피 해변에 한눈에 반해 버렸다. 밤이 되면 집집마다 밝혀지는 노란 불빛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곧장 이탈리아 전문 여행서적을 구입하고, 후기가 좋은 숙소를 찾아내 호스트와 메일도 주고받고, 비행기 티켓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주위 친구들이 하나둘씩 해외여행을 가기 시작할 때라 해서 마음이 더 급해졌다.
여행 날짜가 점차 다가오자 내가 벌린 일에 덜컥 겁이 났다. 도대체 어쩌자고 혼자 여행을 갈 생각을 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 우선 나의 재정 상황과 영어실력 그리고 학업문제 등을 앞세우며 여행을 취소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리고 그 이후 수습은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호스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여행을 취소하게 되어 ‘정말 아쉽다’는 메일을 보냈다. 이 때는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을 때보다 더 비참했다. 결국 나는 도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출국 예정이었던 날은 비가 쏟아질 듯 많이 내렸다. 어쩌면 비행기가 뜨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조차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취소하고 나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발걸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여행이나 모험과 관련된 책들이라면 어떤 종류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내 마음은 주인공이 방황하고 시련을 겪지만 결국 이뤄내고야 마는 이야기에 끌렸다. 그토록 원하면서도 왜 눈앞에서 포기해버렸을까. 그건 스스로 책 속의 주인공과 같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결국 여행을 떠나는 건 나에게 과분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는 거지. 만약 가볍게 휴양이나 관광을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까지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그 이후로 몇 년간 홀로 플랫폼에 서서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기분 속에서 살았다.
'나는 간절하지 않아',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순간 뭐든지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나는 항상 저울질을 했다. 어떤 선택에 있어 손해를 피하는 것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쉽게 전자를 선택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얼마나 간절해야 행할 수 있으며, 무엇이 준비가 되어야 나아갈 수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답은 쉽게 속일 수 있으니깐. 결국 현실에 맞설 힘이 부족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기 두려울 뿐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도망간다면 영원히 이런 선택만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영어실력이었고, 물론 국내여행을 혼자 한 적도 없었으나 남미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 커다란 두려움을 뒤로하고 남미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마침내 어떤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다. 그저 도망가고 싶은 내 자신을 견뎠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여행을 시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긴 과정을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나에게 용기란 외부의 어떤 것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존재를 견디는 게 아닐까.
내가 예약한 항공편은 인천에서 밴쿠버 그리고 토론토를 거쳐 마지막 종착지인 상파울루에 도착하는 루트였다. 남미는 지구 반대편이니 비행시간은 무려 24시간이다. 두 지역을 환승하고 통과하는 시간은 14시간으로 총 38시간이 걸린다. 며칠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나 예상보다 훨씬 진이 빠져버렸다. 공항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목적지가 정해진 사람들의 발걸음은 거침없다. 이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먼 길을 떠나는 걸까?
가장 힘들었던 건 밴쿠버와 토론토를 환승할 때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공항과 수많은 외국인들에 압도당했다. 수많은 인파들이 뒤섞여 있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분명 인터넷에서 본 글에는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된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표지판을 봐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분명하지 않았다.
애써 헤매지 않는 척 고개를 크게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가다가 입국심사 줄을 찾을 수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일본인 여자분에게 이곳이 환승하는 곳이 맞는지 물으니 친절하게 이곳이 맞다고 말해 줬다. 한결 안심이 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던 공항 직원에게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제대로 줄을 섰다는 사실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잠시 문득 입국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글이 떠올라 또다시 긴장이 됐다. 줄을 서는 동안 준비해뒀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앞에는 두 개의 입국심사 부스가 있었고 기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이 심사가 끝난 부스로 차례대로 걸어갔다. 줄이 짧아질수록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이제 와서 돈을 더 들여서라도 직항을 탔어야 했다고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입국심사관 두 사람 모두 남자였는데 한 분은 친근한 인상에 허술하게 심사를 할 것처럼 느껴져 그분이 내 심사를 맡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깐깐한 인상의 심사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Next!"
심사관에게 여권과 입국심사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대충 훑어보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캐나다에는 왜 왔습니까?"
"저는 브라질로 갑니다."
"브라질은 왜 가나요?"
"친구를 만나러 가요."
"한국인?"
"아뇨. 브라질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우리는 고향에서 만났어요."(왠지 동문서답을 한 느낌이다.)
"흠.. 그녀는 일하러 왔었나요?"(여자라고는 안 했는데)
"네"
"브라질엔 얼마나 머물 건가요?"
"친구 집에서 3개월 지내다가 남미를 여행할 거예요."(너무 오래 잇는다고 하면 수상하게 볼까 봐 일부러 기간을 줄여서 말했다)
"언제 가나요? 캐나다엔 머물 건가요?"
"아뇨. 지금 가야 해요."
심사관의 예리한 눈빛에 살짝 주눅이 들었으나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물음에 차분히 대답하려 애썼다. 심사관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마지막 답변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OK"라고 말하며 쾅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여권을 받자마자 도장을 확인하고는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드디어 캐나다를 벗어나 브라질로 간다.
긴 기다림 끝에 올라탄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토론토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커다란 도시에 금빛이 빼곡히 반짝인다. 갑자기 이 장면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창문에 반사된 내 얼굴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기에 있는 내가 너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최대한 야경을 예쁘게 찍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그 순간 바로 옆에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께서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촌스럽게 굴었나 싶어 민망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비행기 창밖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들떠 있는 젊은이를 응원하는 미소였다고 생각된다.
브라질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이다. 곧 내가 그토록 바랐던 종착지에 도착한다. 출발 전부터 마음에 무겁게 자리 잡았던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비행기 안에서 잠들고 깨기를 반복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난 질문 역시 가슴 한가운데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그 무거움은 여행을 계획하기 훨씬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거움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과연 남미에 내려놓고 올 수 있을까? 그 무게를 견디며 지구 반대편으로 온 스스로를 격려해본다.
기나긴 여정 끝에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가! 더운 공기가 훅 하고 들어와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바깥 풍경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열대 나무 몇 그루가 거리에 있었다. 날씨는 우리나라의 덥지 않은 여름 정도이다.
근처에 스피커가 있는 건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리듬을 타고 싶게 만드는 기분 좋은 멜로디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남자가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보다는 작은 악기였다. 그 순간 브라질에 왔음이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