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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

여행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by 독당근



이제야 남미 배낭여행기를 쓰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10년이 지났고, 여행의 기억은 나에게서 점차 흐려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1년 동안은 매일 같이 들뜬 마음으로 남미에서 썼던 글과 사진을 꺼내 보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나게 남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만큼 남미 여행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남미 여행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의 첫 장에는 준비물 목록이 쓰여있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지마켓에서 낮은 가격순으로 정렬하여 가장 저렴한 물건으로 산 기억이 난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여행 도중에 물건 대부분을 다시 사야만 했다(트레킹하다 배낭이 끊어진 슬픈 기억이…). 그리고 옆 페이지에는 ‘도전’, ‘모험’, ‘발견’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단어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직업을 가지기 위해 시험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단어처럼 느껴진다.


노트를 더 읽어 내려가다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마치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낯선 기분. 사람들은 내가 남미 배낭여행을 다녀온 걸 알게 되면 무척이나 놀라고 신기해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여행을 다녀온 초반까지만 해도 어깨를 으쓱하게 했으나, 지금은 베낀 숙제를 칭찬받는 것처럼 한없이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런 뒤에는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남미 여행이 삶의 한가운데 중요하게 자리 잡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고이 잘 보관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이 여행이 쉽게 잊히는 과거의 수많은 기억 중 하나가 되지 않길 원했고, 또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 결의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지금은 여행과 관련된 물건만 봐도 숨이 턱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휴 얼른 이걸 정리해야 할 텐데….’(라고 말하면서도 슬금슬금 피해버리고 만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하면서, 또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 여행을 정리하는 것을 미뤄왔다. 그 대신 사회 속에 무사히 안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쁜 날들을 보냈다. 언젠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정과 여유가 생길 때, 나의 여행을 멋지게 기록할 거라 다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장인이 되어서도 무슨 이유인지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또다시 머뭇거리게 되었고 그런 기간이 길어지면서 여행을 되새기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내는 게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스스로를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렸다. 이게 나를 위한 길이며,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슬아슬한 고가도로를 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쌩- 쌩- 타이어에 불붙은 듯 달리던 자동차가 어느 지점에 와서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어수선하고 안절부절못했으며,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에 괴로웠다. 내 안에서 들리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커다란 울림.


결국 이 여행을 정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남미 여행 노트와 사진을 보았을 때의 낯선 기분은 ‘아픔’이었다. 더 이상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꿈, 희망, 자유, 방황과 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마지막으로 생명력과 같은 활기 넘치는 젊음의 에너지가 사라져 가는 것 모두. 무엇보다도 그때의 내가 수없이 마음속으로 새긴 결심을 전혀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와서는 그 결심이 무엇인지도 희미해졌으며, 지켜야 할 것과 그럴 필요 없는 것조차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영혼의 한 부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낼 뿐이다.


이 여행의 기억이 소화되지 않은 채 얹혀버린 건 삶에서 그저 흘려보내면 안 되는, 혹은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그 안에 있어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게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기도 하고,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결국엔 회한만 가득한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지금의 삶과 전혀 섞일 수 없는 알갱이들을 애써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버릴 것만 같으니까.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나’로서 현재를 살아가야 하니까.


이번에는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미 여행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생각보다 세세하게 그때의 크고 작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당시의 기억을 꽤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설렘, 두려움, 걱정,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 역시 그대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마치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20대의 고민 많은 나와 반가운 친구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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