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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론-6
통증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린 바늘에 찔린 통증보다 칼에 찔린 통증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두 개의 통증 중 어느 게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 컵에 담긴 물의 온도는 온도계로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피부 자극으로 알 수도 있겠지만 어느 통증이 크고 작은 가를 아는 것은 통증이라는 측면에서 ‘온도계’ 같은 게 있어야 합니다. 질적(質的)인 것을 양적(量的)인 것으로 읽어내는 계기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두 컵에 담긴 물의 온도(상태)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리고 질적으로 다른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란 양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질적인 차이라는 의미입니다. 질적인 것은 반드시 양적인 관점을 들이대어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때 동일한 게 아니라 다른 것이야 말로 비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것의 비교는 ‘위계(位階)’가 아니죠. 오히려 동일한 것이야말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특히 질적으로 다른 것)이 비교되려면 ‘동일성의 잣대’가 필요할 겁니다. 그때 비교 즉 위계적 비교가 가능해지죠. 이때 ‘위계’는 동일성을 전제로 한 비교입니다. 가령 크다 작다와 같은 양적(量的) 비교를 말하는 것이죠.
두 통증도 그렇습니다. 두 통증은 다른 것(통증)인데 그걸 비교하려면 마치 온도계처럼 통증과 관련된 동일성의 잣대가 있어야 합니다. 길이를 측정하는 자 혹은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 등은 모두 동일성의 잣대죠. 동일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비교’할 수 없겠죠. 일상에서부터 우주까지 이미지로 가득하다면 그런 이미지들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비교가 없다면 우리 일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단견(斷見)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당신도 옳고 나도 옳고. 이런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사회를 혼돈(混沌)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처음엔 각자의 특수한 상황이나 독특함으로 인정해 줄 순 있지만 그게 심해지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즉 실체론만큼이나 무서운 ‘비실체론’으로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죠.
이때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정도(程度)의 차이’를 도입해야 합니다. 하여 뜨거운 물, 찬 물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필요한지도 합의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정도의 차이’를 ‘진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이미지’처럼 ‘강도(强度)의 차이’들이죠. 하지만 ‘강도의 차이’들만으론 우리 사회는 물론 일상이 무척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정도의 차이’ 밖에 없다는 것과 모든 게 ‘강도의 차이’들이지만 삶의 편의를 위해 ‘정도의 차이’를 도입하는 것은 다릅니다.
‘강도의 차이’를 넘어 ‘정도의 차이’가 빛나는 세계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가령 ‘이데아’, ‘신’ 같은 겁니다. 하지만 오직 ‘강도를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정도의 차이’를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두가 ‘한 끗 차이’인 것 같습니다. 반면 한 끗 차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잘못될 수도 있지만 잘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면벽 9년’과 우리도 한 끗 차이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누구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명제와도 연결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대단하다는(?) 불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