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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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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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좀 더 살펴봅시다.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 걸까요? 뇌 혹은 더 구체적으론 대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뇌는 기억이 저장되는 곳이긴 하지만 컴퓨터로 말하면 ‘RAM’ 같은 곳이죠. 기억이 저장되는 곳이라기보다는 기억을 퍼 올리는 두레박 같은 곳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뇌는 정신적 그 어떤 것이라 하기보다는 기계적 장치라고 해야 할 겁니다. 어떤 기억이 얼마나 저장될까요? 가령 시속 350km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서 본 풍경은 기억될까요? 이미지라는 관점으론 모두가 기억되어야 할 겁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이미지는 기억됩니다. 그 많은 이미지들은 어디에 기억될까요? 우리가 본 것도 이미지이고 나의 몸(육체와 정신)도 이미지인데 물건을 주머니 속에 넣듯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기억 속에 기억됩니다. 마치 이미지가 중첩되듯이.

기억은 ‘이미지의 주름’이라 생각합니다. 바다와 파도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파도는 바다에 저장되는 것이긴 하지만 파도 홀로 저장되지 않습니다. 파도는 바람과 함께 저장되지요, 마치 바다에 본래부터 속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것이든 홀로 중첩되지 않습니다. 기억의 중첩도 그런 방식입니다. 구체적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주름’ 같은 곳에 말이죠. 그게 바로 ‘존재론적 기억’입니다. 무한하게 중첩되는 곳이죠. 그야말로 무한입니다.

이때 기억은 종이 한 장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기억이 쌓여도 종이 한 장 즉 ‘바다’와 같은 곳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모두 기억된다는 겁니다. 이미지로 발현될 때 그 모습 그대로에서 시작하여 이미지들끼리 주름이 잡히면서 변형이 가해지는 것까지.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같은 겁니다. 우리 기억 중 단 한 조각이라도 기억이 되지 않는다면 우주는 그것 때문에 뒤틀어지게 될 겁니다. 우주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기억의 조각(한 장의 이미지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기억됩니다. 그리고 압축되고 발산됩니다. 그게 지금의 이 우주입니다.

그럼 ‘기억 상실증’ 같은 것은 어떤 걸까요? 그건 기억이 상실(사라졌다는 의미)되었다는 의미가 기억을 퍼 올리는 기계 즉 ‘뇌’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기억이라도 퍼 올리는 기계에 의해 달라 질 수 있을 겁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기억하고 그 기억 주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기억, 우주의 기억이 종이 한 장이고 또 그게 무한대로 압축 주름졌다 하니까 우주가 아주 작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무한이라고 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래서 난 우주가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죠. 닫혀 있는 것과 열려 있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이때 열려 있는 무한으로서의 우주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동전을 던졌을 때 동전이 모서리로 설 확률을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무한하게 던진다면 그 좁은 면으로 설 수도 있겠죠. 우주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무한하게 주름지고 펼쳐집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우주 속에서 무한하게 ‘던짐’의 산물이죠. 아무리 작아 보이는 확률이라도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겪는 지금의 사건도 다시 부활 가능할까요. 그런 확률은 없겠지만 근사치는 끝없이(이것 역시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겠죠. 마치 영원회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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