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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론-15
이미지와 이미지가 만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이미지는 이미지에 의해 증거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한순간 머리를 돌려 주변 풍경을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에는 온갖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머리를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풍경의 구도는 그런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자신의 풍경을 증거 하지요. 굳이 ‘신(神)’ 따위를 불러(혹은 설정하여) 증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이 증거 하는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43번 버스를 타는 사건과 비슷합니다. 저는 롯데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롯데 아파트에서는 종점(회동동)에 있는 43번 버스를 탈 수 없습니다. 롯데 아파트에 있는 나는 43번 버스가 강변 자동차 매매 시장 정류장에 올 때까지는 탈 수 없습니다. 내가 아파트에 있는 한 그 버스가 정류장에 와도 못 타지요. 그건 버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정류장에 도착했더라도 내가 롯데 아파트에 있다면 내가 43번 버스를 타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정류장에 도착한 43번 버스를 내가 타는 사건은 오직 한 순간뿐입니다. 그때 버스의 무수한 이미지 중 하나가 나라고 하는 무수한 이미지들 중 하나를 증거 하는 것이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버스의 온갖 이미지들은 나의 온갖 이미지들과 마치 1:1 대응을 즐기듯 증거 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 이미지’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순간 이미지처럼 사건을 만드는 모든 이미지들의 ‘반복’이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무수한 사건의 풍경 속에 살고 있지요. 물론 나도 사건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오감(五感)이나 합리적 법칙 그리고 책이나 더 나아가 신 따위가 무언가를 확실하게 증거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지를 증거 하는 것 역시 이미지라는 말입니다. 이미지를 증거 할 수 있는 것이 이미지뿐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엔 온통 이미지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말한 내가 볼 수 없었던 모니터 뒷면을 증거 하는 것 역시 이미지라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증거 하는 것도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을 때 동부태평양에서 조업하고 있는 연승어선을 증거 하는 것도 말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특정 풍경을 주변 이미지들이 증거 하기에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나의 풍경도 버스 풍경도 그들이 만나는 사건도 그리고 심지어 매번 순간적으로 부딪치듯 만나 금방 사라지는 풍경도 모두 이미지가 만들어내고 그걸 이미지로 간직하고 또 이미지로 증거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이미지를 증거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난 그게 이유라기보다는 존재의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미지를 증거 하는 것은 이미지뿐이기에 그 마지막 증거를 다시 증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엔 오직 이미지들뿐이니까요. 이것은 마치 역전된 ‘신(神)’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런 구도에 속으면 안 됩니다. 이미지들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 ‘실체’는 아니니까요. 물론 우리는 일상에서 흘러넘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편의상 ‘꽃다발’처럼 묶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게 ‘conception’이라 불리는 ‘개념’이죠.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나’라는 이미지는 특정 이미지를 잡아내려고 애쓰는 것이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는 일상이 휩쓸려 떠내려 가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니까요. 생명은 그런 걸 못 견뎌하지요. 하지만 이미지 너머에 실체가 없다는 것만 안다면 그런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