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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철 Oct 18. 2024

10) 도쿄 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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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쿄 근해


도쿄 근해는 짙은 안개 밭이었다. 우리 배의 선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선장과 나는 긴장한 채로 당직을 서고 있었다. 당시 원양어선엔 알파레이더(ARPA RADAR, 상대방의 위치를 추적해 주는 기능을 가진 레이더)가 없어 모두 일반 레이더의 커서판(cursor, 레이더 화면 위에 붙어 있는 기준선들이 그어진 투명판)만으로 다른 배와 우리 배와의 관계를 관찰 수밖에 없었다.

      

레이더 상에서 다른 배 위에 커서선(線)을 맞추어 놓았을 때, 그 배가 커서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 배와 가까워진다면 그 배는 우리 배와 충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걸 회피해야 하는데 레이더에는 한 개의 커서선 밖에 없으므로 주위에 다른 배가 많을 때는 결국 제일 가까운 배부터 체크하면서 안전하게 회피하는 수밖엔 없다. 그러다보니 무중(霧中)에 주위에 배가 많으면 레이더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키(조타륜, steering wheel)만 잡고 있을 뿐 우리 배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장은 연신 죄 없는 안개에게 욕을 해대었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00시쯤 되었을 것이다. 선장은 갑자기 소리쳤다.

“아앗 이런 시벌 놈 좀 보소, 2항사 하드 스타보드!”

나는 키를 급하게 오른쪽으로 이빠이(최대) 돌렸다. 배가 회두력(回頭力)에 의해 왼쪽으로 급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항해 초보인 나는 그것만으로도 약간 겁이 났다.

‘이거 배 자빠지는 거 아이가?’

선장은 브리지 포트(port, 왼쪽)쪽 창가로 뛰어 갔다. 그리곤 30초쯤이나 지났을까, 뿌옇게 보이는 큰 배가 우리 옆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게 얼마가 가까운 것인지 나는 레이더를 직접 보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의 불빛들이 어렴풋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을 정도라면 매우 가까운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선장은 놀라서 다시 물었다.

“하드스타보드 맞지?”

나는 큰소리로 복창했다.

“하드스타보드 써!”

선장을 브리지 전면에 있는 사이렌을 길게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집(midship, 조타륜 중립)!”

키를 중립에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충돌 직전에 배를 피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느낌과 선장의 느낌과는 달랐다. 난 그저 선장의 조타명령을 수행했으며 바로 옆을 스치다시피 지나 간 배를 보았을 뿐인데. 선장은 레이더를 볼 때부터 그 배가 가까워지는 것,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급하게 조타명령을 내린 것 그리고 실제로 문제의 그 배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선장은 나보다 훨씬 강한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공포를 느꼈다면, 선장은 직접 겪은 것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말이다. 배는 다시 정상 코스로 운항되었고 선장은 배전반 앞 의장박스(儀裝, flag, 각종 신호용 깃발)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매우 작은 소리로 말했다.

“2항사 무중항해가 요로코롬 위험 허다”

말은 2항사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사실 난 초보항해사라서 그런지 그 공포가 의문처럼 여겨졌다. 잠시동안 ‘여기서 이렇게 자빠지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것을 느꼈을 정도라고나 할까.  

   

선장은 레이더를 보더니 이젠 아주 가까운 배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멀찍하게 배가 몇 척 있다고 하면서 ‘무중항해’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를 했다. 우리는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위험을 직면하고 회피했으며 그로 인해 공포를 느낀 것이다. 종교적 체험도 그런 것일까? 근데 지금 생각하면 우린 왜 도쿄 근해로 항해했을까. 비록 모든 항해가 최단 코스로 가는 게 맞지만 굳이 안개 밭인 곳, 그것도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도시이자 항구여서 수많은 배들이 버글버글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곳으로 말이다. 위험하고 복잡할 가능성이 높았다면 좀 늦더라도 그곳을 피해 둘러 가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대 시간에 맞춰 초사와 3항사가 브리지로 올라왔다. 선장은 안개가 엄청나며 도쿄 앞바다라서 지나다니는 배가 많으니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3항사에게 브리지 뒤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자겠으니 담요를 갖고 오라고 했다.     


침실로 내려와 누웠는데도 브리지에서의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과정을 직접 겪지 못한 공포 말이다. 희뿌옇게 보인 것은 과연 배였을까. 점묘화의 입자처럼 경계가 불확실한 채 떨리던 어떤 발광체들, 그것은 무슨 배였을까? 컨테이너선 아니 여객선? 그런데 그들은 우릴 봤을까?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였을까? 349톤짜리 한국 트롤어선? 아니 작은 돛단배로 보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UFO? 우리의 조우(遭遇)는 이미 오래 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 내게 공포가 된 것일까. 잘 볼 수 없었던 공간이라서 그런 것인가? 뿌연 물체와 레이더 그리고 선장의 조타명령이 계속에서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의 끈이 끊어진 순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K808호는 안개 속을 무사히 빠져 나온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배는 시야가 툭 트인 바다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출항 후 이렇게 밝은 곳에서 태평양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잠 덜 깬 얼굴을 한 선원들이 하나 둘씩 데끼로 모여 들고 있었다.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바다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걸 말하듯 푸른 하늘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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