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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철 Oct 16. 2024

8) 깡깡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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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깡깡 작업     


하지만 우리도 그 사건 때문에 좀 더 일찍 외항(外港)으로 배를 옮겨 앵커링(anchoring, 닻을 놓은) 상태에서 작업을 하였다. 깡깡, 도색(페인팅), 데끼 이다 교체, 어구 점검 등등 수많은 작업들로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렸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깡깡 작업’은 잊을 수 없다. 배의 구석구석 금속 위에 피어난 ‘녹(綠)’을 끝이 뾰족한 망치로 때려내는 작업이 그것이다. 눈을 보호하기 위한 플라스틱 안경을 끼고, 우에스(기관실에서 사용하는 마른 헝겊)를 마스크처럼 입에 두르고 작업을 하였다. 깡깡 망치로 때려내는 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스크래퍼라는 납작한 금속으로 그 부위를 다시 긁어낸 다음 그라인더 페이퍼(grinder paper, 전동숫돌)로 갈아 금속의 맨살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러면 그곳에 사비(녹 방지 페인트)를 칠하고 나중에 그 위에 일반 페인트를 칠하는 게 깡깡 작업의 과정이었다. 


해수와 해풍 그리고 오랫동안 항구에 방치되었던 K808호는 깡깡 작업 할 곳이 거의 무한대였다. 깡깡 작업할 땐 일개미처럼 모두가 녹이 핀 금속에 달라붙어야 했다. 하늘 높이 울려 퍼지던 쟁쟁한 ‘깡깡’ 소리, 금속에 숨겨진 오래된 상처들이 피워낸 녹을 찾는 작업, 그런데 우린 무엇을 그토록 털어내려 했던 것일까? ‘깡깡’ 소리는 환청이 되어 고막을 때리고 두성발성이 토해내는 고음의 하모니처럼 온 몸에 전율을 남겼다. 우린 옆에 있는 동료들의 검어진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깡깡 소리는 독주가 아니라 협주곡이었고 그걸 통해 우리는 죄를 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깡깡 소리와 너의 깡깡 소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무언가를 두드려 깨우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는 소리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망각의 상자를 닫으려는 시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절대 닫히지 않는 중층의 기억들, 중생들이여 너희들이 어제 한 일을 아느냐? 아니 수십 년, 수천 년 전에 한 일을 아느냐? 내리꽂이는 ‘수직의 힘’은 무엇을 지우기 위한 안간힘인가. 깡깡깡깡 때려도 때려도 지워지지 않는 녹의 꽃처럼 그것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벗어나려는 우리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이었다.    

  

‘관세음보살’하면 기관장이 생각난다. 그는 ‘절에 다닌다’고 했는데 기계 수리를 하다가 잘 안 된다 싶거나, 때론 어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몇 번이고 부른다고 했다. 이때 ‘관세음보살’을 밖으로 외치는 게 아니라 속으로 부르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듣는 귀 때문일 것이다. 가령 기계의 일이란 기계론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또 해결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중차대한 지점에서 ‘관세음보살’을 밖으로 외친다는 것은 그 기계에 접근하는 자신의 합리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형이하학(形而下學)과 형이상학(形而上學)을 엄격하게 분리할 수 없다는 관점도 있고, 또 분리할 수 있다는 관점도 있지만 어쨌든 기계는 합리적 기계론이 1차적 접근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을 수십 번 속으로 불렀음에도 ‘기계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도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실 ‘관세음보살’은 벌어진 상황과는 다른 초월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의 기계론적 분석이나 합리성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 하거나 아니면 ‘관세음보살’을 불렀던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관장이 말한 ‘절에 다닌다’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처럼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절에 다니는 것’이지, ‘붓다의 깨우침’을 배우러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 앞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절에 다니는 것’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명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배에서 기관의 역동적인 운동을 중단 없이 가능케 하는 것은 기관장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기관장은 기관의 힘이 어떤 한계치를 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시한다. 실제로 기관의 힘은 다른 것과 달리 일정한 한계 내에 있어야하고 그와 관련된 보살핌도 필요하다. 반복되는 점검 그리고 연료와 윤활유를 주기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게 그것이다. 그러므로 가끔은 기관의 최대치에 대한 범위를 놓고 기관장과 선장이 힘을 겨루기도 하지만, 대부분 어선 특히 작은 어선일수록 선장의 힘은 기관장을 눌러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선장은 기관에 대해선 아는 것도 별로 없음에도 말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정말 무식하게 선장은 기관에 대해 고집을 피울 때도 있다. 그것은 같은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곤해도 각자가 이루어야 할 욕망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둘 다 고기를 많이 잡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망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각자 욕망의 강도와 상관없이 그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획득한 결과물의 크기가 큰 곳으로 힘들은 쏠리게 된다. 사회에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미친 듯 몰리고, 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크고 강한 이익집단의 구성을 가능케 하는 힘은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보는가? 그건 모든 욕망이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욕망’이라는 걸 증거 한다. 하여 권력의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그런 ‘권력의 세습’이 거대한 ‘권력의 뿌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상선의 경우 어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항해와 기관이 나름대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선장은 기관장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대체로 선장과 기관장의 임금 격차도 거의 없거나 크지 않다. 기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끝이 없다. 기관이 멈춘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날씨 험악한 황천항해를 할 경우 기관이 멈춘다면 그야말로 그 상황 자체가 ‘황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관장이 속으로 부르는 ‘관세음보살’도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잘 되자는 것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합리적 기계론에는 늘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합리적 기계론이든 ‘관세음보살’이든 만약 엔진이 꺼져 버린다면 그와 함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꺼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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