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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철 Oct 14. 2024

6) 하꼬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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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꼬다데(函關)     


홋카이도의 하꼬다데는 일본 북태평양 조업의 전초 기지 같은 곳이었다. 5월 말이 다 되었지만 산봉우리엔 흰 눈이 희끗희끗 보였다. 우리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배로 가야 했으나 배가 아직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되질 않았다고 했다. 대리인 ‘이께다’는 일본인 영감으로 한국말을 곧잘 했다. 그리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일본 잡화선 국장(통신장)할 때 부산항에도 많이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친절한 것 같았다. 친절이 습관화 된 상태라고나 할까. 그들은 마치 터치를 하면 작동하는 ‘오르골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친절도 질이 좀 다르긴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주인아저씨는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마누라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하꼬다데에 있으면서 나와 3항사에게 엄청난 친절을 베풀어 줘서 아직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홋카이도라서 그런지 추위에 대한 대비가 철저한 것 같았다. 잠자기 전에 여관 주인 부부가 와서 손님이 요 위에 누우면 이불 본체 말고도 작은 이불들을 가져와 머리와 발쪽을 꼼꼼하게 감싸 주었다. 그냥 이불과 배게만 놓여 있는 우리네 여관과는 달랐다.    

  

하꼬다데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부두에 계류해 놓은 배로 가서 일을 해야 했었다. 처음 배를 본 순간 놀랐다. 배가 너무 작은데다가 낡아 보였던 것이다. 저 배를 30개월 동안 타야 한다는 말인가. 실망스러웠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 달은 좆뺑이치야겠네”

갑판원 이상정이었다. 그는 헷또(1갑원) 김태한과 친구 사이였는데, 라스(라스팔마스, 북대서양 스페인령)에서 트롤어선 경험이 많다고 들었다. 눈이 작고 얼굴에 점이 많은 헷또가 연이어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상정보다 작았다.

“아 시바 좆또 후발대로 가야 하는 긴데 내가 와 선발대로 왔실꼬. 안 따라 와야 하는 긴데”

그때 3항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좆또 새끼’

마구로 배에선 헷또를 ‘좆또’라 부르기도 한다. 비하하는 말이긴 한데 또 어떻게 보면 그런 방식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꺾어 새로운 자리로 찾아가게 하는 느낌 즉 ‘이중 분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내겐 3항사가 말한 ‘좆또’가 분명 욕으로 느껴졌다.  

   

K808호는 일본에서 북해도와 북태평양 어장을 뛰던 349톤짜리 트롤어선이었다. 선령 5년짜리로 엔진은 2,700마력 당시로선 상당히 마력이 높은 편이었다. 그런 배를 ‘독꼬다이(돌격대)’라 불렀는데 북태평양 어장에서 겁 대가리 없이 돌진하는 놈들로 평판이 자자했다. 배가 작고 빠른데다가 항해사들이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니 통신도 거의 안 되고, 방질(그물을 끌고 다니는 방식)도 무대뽀(막무가내)인 경우가 많아 다른 어선들에겐 두렵고도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해야 할 기관장 김경신이 자신의 각오를 다지듯 말했다.

“드가자!”


그 때 곽선장은 기관장 앞에서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장이 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어둡고 낡은 배 안으로 선원들이 움직였다. 선장은 갑판과 처리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초사, 갑판장, 기관장을 불렀다. 그리고 초사에게 최대한 빨리 배에서 잘 수 있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갑판장 이석태에겐 데끼 이다(갑판에 깔린 판자)는 다시 깔아야 할 것 같으니 보고 쓸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뜯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조리장 ‘박영철’을 불러 기관장 김경신과 함께 최대한 빨리 배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주방 정리를 하라고 명령했다.      


기관실에 내려갔던 기관장은 몇 분 후 투덜거리면서 다시 올라왔다. 기관실엔 일을 하려고 해도 제대된 공구가 없다는 거였다. 선장은 브리지로 올라가 버렸고 그 자리엔 초사가 모든 선원들에게 침실 청소를 지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대리인 이께다가 말하길 공구 오는데 대략 5일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출국이 생각보다 빨랐다는 핑계를 댔다. 그 소리에 선장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더니

“기관장! 없는 공구 타령하지 말고 기관부, 갑판부 할 것 없이 모두 달라 들어 배에서 최대한 빨리 잘 수 있도록 혀 알았지”

기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신 허리를 굽신 거렸다. 대부분 어선 기관장들이 그렇지만 김경신 기관장의 굽실거림은 더 심해 보였다. 우리 선장의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여기서도 강력하게 발휘되는 것 같았다.      


기관장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선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원양어선에서 조기장(1기원)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4수만에 겨우 기관사 면장을 땄다고 했다. 나이가 선장보다 10살이나 많아도 찍소리 하지 못했다. 2기사 손길부는 그런 기관장보다도 10살이나 많았지만 그 역시 국내선 기관원 출신이었고, 3기사 김세철은 갓 졸업한 남해수고 출신이었으며, 오직 1기사 이성달만이 라스어장을 뛰어 본 경험이 있는 통영수전 출신이었다. 선장이 워낙 학교 즉 2년제, 4년제 같은 것을 따지다 보니 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대체로 말 수를 줄이고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기관장은 또래인 조기장 김민식과 친했는데 예전에 국내선에서 오랫동안 같이 배를 탔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기관부품 발주나 점검도 모두 조기장과 상의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띠였다. 보통 조기장은 ‘면장 없는 기관장’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도 조기장은 라스어장 경험도 있었다. 다만 조기장은 기관장보다 학벌이 더 약한 초등학교 졸업으로 영어로 된 발주서는 거의 읽어 내지를 못했다. 그래서 자기는 결코 기관장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기관장에 비하면 훨씬 실력도 있고 그리고 줏대도 포용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1기사는 약간 왕따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면 1기사가 왕따 당하는 게 아니라 1기사가 다른 기관부원들을 왕따 시키는 형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관부원들은 1기사만 빼고 모두 같은 고향 즉 남해 사람들이었다. 친척 지간이 아닌 게 이상할 정도로 모두 동네 주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관부원은 모두 기관장이 구성했었는데, 선장이 기관부에도 학교 출신이 하나 있어야 한다면서 1기사는 따로 구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1기사는 성격이 송곳 같아 나이가 많은 2기사와 갈등이 심했다. 하긴 2기사는 오직 나이를 앞세워 아무나 보고 처음부터 말을 놓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초사보고도 처음엔 ‘어이 초사’라고 해서 선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였다. 항해사들은 그 모든 걸 ‘기름쟁이의 곤조’라고 흉을 보았다. 그러다보니 초창기 배 분위기는 마치 들개들의 영역 다툼처럼 서로가 우위를 점하려는 갈등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당시 트롤원양어선을 살펴보면 항해사관의 경우 학교가 되었든 어찌되었든 질서(위계질서)가 좀 잡혀있었지만 기관사관의 경우는 짬뽕처럼 보였다. 기관사는 대부분 국내어선이나 원양어선 기관원으로 시작해서 낮은 등급의 면장(가령 5급이나 4급 기관사)부터 획득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항해사들과는 달리 직급에 따라 나이 많고 적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저런 갈등이 많이 생기는 구조였다. 어릴 때부터 배를 탄 사람은 빨리 기관장이 되는 반면, 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나이가 기관장보다 훨씬 많아도 직급이 낮은 기관사로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대신 기관과 관련된 전문학교 출신들은 어선보다는 상선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선은 학교출신들이 모이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직급과 나이가 동조하는 편이었다.     


요즈음은 한국선원의 숫자 자체가 얼마 되질 않지만, 1980년 당시는 외국선원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한국선원이었기에 학교, 나이, 직급 이런 것들에 대한 갈등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든 갈등 구조는 약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피해자는 늘 더 낮은 계층이었다. 1980년대 후반, 외국선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러 갈등의 파생물들도 그들이 흡수하는 구조가 되었다. 한국선원들은 그들보다 상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차원으로 승화 되었던 것이다. 하여 가끔은 인종 차별에 가까운 말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한국 선원들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갉아 먹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연하게 자신도 속해 있는 그 자리를 자신은 속해 있지 않고 그곳에서 외국선원들만 발견하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가령 자신이 낮은 직급 때 겪었던 고통과 모순을 잊어버리고 외국선원들에게 그런 고통과 모순을 떠넘기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를 갖는 한국선원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초장기 외국선원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겪는 갈등이 같은 선원들 간(한국선원과 외국선원)의 갈등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노동조건은 완전히 다른 경우 같은 게 그것이다. 요즈음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갈등 구조라고나 할까.

     

중국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선원으로 들어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200불(200불 중에서도 배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은 100불이었고, 100불은 국가에 적립되어 계약을 마치면 받을 수 있었다)을 받았고, 한국선원은 그것보다 8배 정도 되는 1600불을 받았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선원들은 그것 자체가 직급의 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해야 할 일 중에서도 좀 힘들거나 더럽다 싶은 일들은 조선족선원들에게 시키거나 심지어 자신이 해야 할 개인적인 일도 조선족선원들에게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 온 조선족선원들은 그런 불평등 상황을 항해사에게 고발하거나 심지어 직접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게 어찌 뱃놈들 세계뿐이랴. 계급적으로 보면 모두 뜻과 힘을 합쳐야 할 같은 계급임에도 계급 속에서 학교, 나이, 직급 그리고 국가나 인종의 다름을 기준으로 갈등을 일으키며 늪 속으로 빠져 드는 것 말이다. 이른바 ‘노동자 계급 간의 갈등과 분열’인데 이런 상황을 누가 웃으며 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지주들은 일본인 지주보다 더 악랄했다고 한다. 마치 지주보다 마름이 더 교활하고 지독한 것처럼. 우리 주변엔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의 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내부의 괴물’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 자발적 갈등구조를 진정 원하고 있는 게 누구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런 구조가 우리 주변에 놓아진 덫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덫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치명적인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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