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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소리가 오케스트라 같이 들리던 날,

chap.14.  아로: 베토벤 선생님, 소리는 어떤 거예요?

2024년 5월...


아마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5월이 될 거 같다.

물론, 인생 전체로 통틀어 봤을 때, top 순위에 들지는 않겠지만


분명 나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던 건 확실하다.


첫째로, 엽상종양을 몸에서 때넨, 수술을 진행한 것,

둘째로, 그동안 준비했던 포폴은 사실상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아 과외 선생님을 바꾼 것.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향후 다룰 이야기가 있다면 다루어보겠다.)


마지막으로, 다시 일기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


5월엔 어떤 부분은 과감히 선택해야 했고,

동시에 포기해야 했다.


끈기를 가져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동시에

끊기를 해야 한다는 체감을 하게 되었다.

(Grit 아닌 끊기 책이 생각난다.)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두려움과 배신감을 다시 느끼게 되며

인간 세상이란 어디든 똑같구나 하는 거도 느꼈다.


그런 신기한 감정 속에서 나는 내가

또 다르게 성장한 줄도 몰랐다.


5월 23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오빠 집으로 가

고양이들을 돌보며 포폴을 만들러 가는 길이었다.


아침 길은 늘 엄마와 함께 한다.

엄마도 근처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날은 엄마가 포폴 만들면서 먹으라고

콩국수 해먹을 거리를 해주셨다.


앗, 그런데 콩국물을 안 들고 온 것이다.


"헉, 지우야 콩국물 들고 와라. 엄마 그러면 잠깐 지하에서 차 좀 보고 있을게."


그렇게 후다닥 집에 가서 콩국물을 가져오고

후다닥 내려와 1층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집 뒤편에는 새로운 주택 단지 공사가 2년간 진행 중이다.

2년 전만 해도 공사 소리가 와우 어마어마했는데,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공사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 같이 들리는 것이다.


어떻게 그 소리가 '오케스트라' 같이 들리지.


머릿속에는 보랏빛과 노랑 주황빛의 선율이 휘젓는 거 같은

오묘하면서 신기한 소리였다.


비유를 해보자면


공사 인부 중 '대장' 같이 보이시던 분은 지휘자 같았다.

팔을 휘휘 저으며 '어이어이, 이쪽 이쪽' 하시는 모습이

음악의 선율의 높이를 조절하는 거 같달까.


크레인으로 긴 원형 모양의 철제를 들어 올리다 보면

그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댕... 댕...; 하는

성당의 종소리도 아닌 불교의 종소리도 아닌

오묘한 생각에 잠기는 소리가 그날따라 났다.


그리고 근처에서 자재들을 들었다가

내리면서 나는 소리들은

때에 맞춰 들리는 타악기 소리 같았다.

그러기에 박자감이 어디를 근본으로 따라가면 되는지 아는 느낌.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었던 건

화장한 초여름 아침의 '햇살'이다.

분명, 햇빛으로 인해 쇠와 자재들의 소리가 그날따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날따라 나에게 공사장에 비치는 '햇살' 들은

수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 같았다.


그 모습들과 소리들이 아우러져서

오묘하고 신비한 마음이 편해지는 오케스트라 소리가 들리는 게

너무너무 신기했다.



그렇게 한 참 생각에 빠진 후,

엄마한테


"엄마, 오늘따라 공사장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 같지 않아??"


그랬더니 돌아온 대담


"아우, 여전히 시끄럽구먼... 네가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져서

저 소리가 저렇게 들리나 보다."


이 한 마디를 듣고 머리를 또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맞는 말 같았다.


나는

이번 달에 포기해야 할 거도 있었고,

그 와중에 외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울하지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은 없어지긴 했지만

뭐랄까


그냥 하루하루가 저 햇살처럼

가볍고 따뜻한 기분이다.


그래서 저 소리가 그날따라 '오케스트라 연주' 소리로 들렸던 것일까.




아침에 그런 일이 있고,

콩국수를 맛있게 먹고


아로와 머루와 함께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영혼을 위해 시공간을 초월한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어떤 기도를 할까.'


단 번에 떠오른 인물은

바로 베토벤이다.



베토벤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기도할 것이다.

살아 있는 단, 한 순간이라도



6살, 어느 여름날

나는 피아노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어릴 때 배웠던 모든 선율들이 다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기억나는 선율은

베토벤의 '운명'이라는 악보이다.


'왜 이렇게 슬픈 노래일까.'


'왜 이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우울해야 했지.'


'이 선율에는 왜 우울한 달빛만이 보일까..'



어릴 적 '운명' 뿐만이 아닌 그의 대부분의 곡에

알게 모르게

어두움이 늘 그윽져 있는 걸 보며


그에게 소리가 안 들려서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린 시절, 그래서 나에겐

하나의 상상이 있었다.


신이 나에게 와서


"얘야, 만일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너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싶니?
너의 기도를 꼭 들어줄 터이니 말해보렴"


이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 두 명의 인물을 말할 것이고


그중의 하나는 베토벤일 것이다.


그 신이 나의 소원이자 염원이자 기도인


"베토벤 선생님이 소리를 하루만이라도 듣고 
행복해하셨으면 좋겠어요."


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베토벤 선생님과

나뭇잎이 우거진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시원한 분수대가 있는


지금처럼 여름날의

숲길 속에서


베토벤 선생님과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여쭈어보고 싶다.


"선생님, 여기 분수대에서

물이 시원하게 나오는 게

마치 저에겐 파란 햇살 같이 보이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선생님, 여기 나뭇잎들에

정말 이쁜 햇살이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내는데요,

저는 마치 한 곡의 연주를 보고

박수치는 사람들 같달까요?

선생님은 어떻게 들리세요?"


"선생님, 여기 흙길이 있어서

더 주변에 들리는 소리들이

더 잘 들리는 거 같아요.

마치 박자에 맞추어 자신의 소리를 내는

타악기 같달까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얼마나 설레고, 재밌을까.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보는 그런 선생님과

여름의 숲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그러고 선생님께 보여드릴 것이다.


우리 집 뒤편의 공사장 모습을


"선생님, 여기가 제가 사는 시대의

공사장 장면인데요, 

소리가 되게 재미있지 않나요??

하나의 오케스트라 같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분은


"시끄럽구나 '마리엘' "


아니 


"재밌는 소리들이 가득하구나.

조화롭지 않아도 조화롭구나"


라고 하실까.



나는 창밖만 보면 온갖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에 한 참 잠겨 있다 보니


'아로'가 내 곁에 와 있었다.


마치


"엄마, 오늘은 무슨 생각해?"


라고 하는 거 같았다.


나는 '아로'에게

'운명'을 들려주었다.


'운명'을 듣는 아로는

그르릉 거리며 창밖을 나랑 같이 쳐다보고 있었다.


우울한 선율이어도


누군가와 함께 듣느냐에 따라
이 선율도 다른 색깔을 품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소리를

듣고

듣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일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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