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Bifan)를 찾았을 때가
10년 전이었던가.
밤새도록 어느 감독의 영화를 연달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날은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차례였지.
첫 상영작은 잭 니콜슨과 셜리 듀발이 열연한 <The Shining>,
관객이 들어차고 조명이 꺼지기 전에
사회자 겸 게스트가 무대에 오르더니 질문을 던지네.
"올나이트 영화제 시작하기 전에 이벤트 성으로 물어볼 게 있어요.
<샤이닝> 이 영화, 나는 몇 번까지 봤다. 제일 많이 본 사람에게 선물드릴게요!
어색해하고 쭈뼛대던 몇몇 관중들이 선물이라는 말에 혹해 손을 들고는 소리쳐.
"두 번 봤어요."
"전 세 번이요."
많아봤자 두세 번 본 사람이 대부분인 듯한데,
내 앞에 앉아 노트북에 워드 화면을 펼쳐놓고 타이핑을 하던 한 사내, 자기 차례가 왔다 여겼는지 번쩍 손을 드네.
"네, 저기 두 번째 열에 앉으신 분. 지금까지 몇 번 보셨나요?"
마이크를 건네받은 사내가 두 자리 숫자를 말하는 순간
극장 안이 술렁거린다.
"서, 서른일곱 번! 자그마치 37번이나 이 영화 <샤이닝>을 보신 거죠?"
"네. 그렇게 됐네요."
"대단합니다. 제가 이 바닥에서 일을 하지만, 주변에 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사람 찾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자주 보게 된 이유나 매력 같은 게 있을까요?"
그 사내는 노트북 스크린을 반쯤 덮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처음에 볼 때는 몰랐는데 두 번 세 번 보다 보니, 처음에 오프닝 시작하면 묘한 음악이 깔리면서 주인공 가족이 탄 차가 구불한 도로를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잖아요.
그 장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뭐랄까, 제가 뭔가에 홀리는 것처럼 영화에 빠져들더라고요.
마치 영화가 생생하게 살아서 두 손을 뻗어서는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날 끌어당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 이후로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면서 일 년에 네댓 번은 이 영화를 찾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군요.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의 디테일을 따라가다 보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치한 포인트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여기 오신 관객 분들은 <샤이닝>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꽤 있을 텐데요. 이 영화의 장점이라든가 매력 포인트를 콕 짚어 주실 수 있을까요?"
"뭐, 제가 미리 말을 하면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일단 부담 없이 편하게 보시라고 말을 해 주고 싶어요.
보시다가 자신의 결에 맞으면 저처럼 여러 번 보게 되는 거구요. 취향에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거지요."
"잘 알겠습니다. 선물 바로 드리겠습니다. 오늘 보시면 38번째 감상이겠네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사회자가 박스에 담긴 선물을 그에게 건네고 퇴장하자 극장을 밝히는 조명이 서서히 꺼진다.
이윽고 한 가족이 탄 자동차가 호수에 인접한 산길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오프닝이 열리고,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한 작가의 비극이 펼쳐진다.
어둠 속에 빛나는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을 향한다.
당신은 <샤이닝>을 몇 번이나 보셨는지요?
아니 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게 몇 번인지요?
볼 때마다 이전에 발견치 못한 치명적인 매력을 하나씩 드러내며 자신을 영화 속으로 홀린 듯 끌어당기는 그런 작품이 있는지요?
가끔은 예전에 흘러간 영화 중에 인연이 닿는 작품이 있다면, 되새겨 즐기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사소한 무언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 당신의 가슴을 두드릴지도 모르니까요.
오늘 문득 10여 년 전. 카페인 음료를 들이부어가며 버티다가, 가끔씩은 꾸벅 졸기도 하면서 밤새 영화를 즐기던 그 시절의 감흥이 떠올라 글을 남겨봅니다.
* The Shining - Official Trailer [1980]
https://youtu.be/S014oGZiS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