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플레이스테이션(이하 플스) 게임기는 오로지 이 게임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열혈 게이머들 몇몇은 오직 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플스를 구매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리얼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라는 진지하면서도 거창한 콘셉트 아래 97년부터 플스와 함께 한 '그란투리스모(이하 그란)' 시리즈. 그란은 기존의 크레이지 택시, 마리오 카트,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 등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과는 궤를 달리하며 실제 트랙에서 드라이빙을 즐기는 듯한, 리얼한 진짜 경험을 게이머에게 선사했다. 모나코 서킷, 엔조 페라리 오토드롬, 레드불 링 등 F1, GP2, DTM의 주요 서킷, 르망/뉘르부르크링/데이토나 24시간 내구 레이싱 트랙뿐만 아니라 나스카, IRL(인디 레이싱 리그), WRC(월드 랠리 챔피언십) 등 메이저와 마이너를 가리지 않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레이싱 서킷/트랙을 재현했다.
드라이빙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는 가장 공들여 게임에 담았다. 람보르기니, 포르쉐, 페라리, 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 애스턴 마틴, 재규어, 푸조, 포드, 혼다, 닛산, 마즈다 등 브랜드를 초월해 자동차 역사에 남을 만한 양산차, 콘셉트카, 픽업트럭, 랠리카, 스포츠카, 슈퍼카에 극소수의 카 마니아 만이 소장할 만한 올드 클래식카까지.. 수백 종의 차량이 게임에 출현한다. 게이머는 그란 시리즈를 처음 시작하면 준수한 배기량의 구형 차량을 소유한 아마추어 레이서일 뿐이다. 처음 달리는 트랙에서 어떻게든 완주 시간을 줄이고, 경쟁 차량을 따돌려 파이널 3등 안에 들고, 카운터 스티어/전, 후륜 드리프트 등 새로운 필살기를 터득하면서 경험치가 늘어난다. 듀얼쇼크 패드나 레이싱 휠을 돌리고 잡아채면서, 그란에 빠지다 보면 총 플레이 시간 '100시간'을 넘어서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대학생 시절, 어느 후배 자취방에 플스 2를 가져온 과 동기는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하며 그란 3에 빠져들었다. 필수 강의도 빠지고 그란 폐인 생활에서 헤어날 줄 모르길래 그 자취방으로 쳐들어가 오버히트 상태인 플스의 전원을 강제로 내린 적도 있었다. 그는 24시간 르망 레이스에 도전 중이었는데, 밤을 연달아 새서 진이 빠진 나머지 화를 낼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친구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퀭한 눈자위를 비비며 이부자리로 기어들어가 그동안 못 이룬 잠을 청했다. 그 정도로 그란 시리즈는 중독성이 강해 게이머의 일상을 허물고, 방구석 폐인으로 전락케 하기 일쑤였다. 또한 플레이 내내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해서 피지컬을 갉아먹는 극악한 게임으로 악명을 떨쳤다. 몇몇 열성 게이머들은 무려 1000시간을 투자해도 즐길 거리에 수집하지 못한 차량과 부품이 남았다며 조잡한 카시트에 앉아 레이싱 휠을 잡고 액셀을 내리밟았다. 그들은 평생토록 그란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할 중증 덕후로, 게이머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다.
나 또한 플스 2 용으로 출시된 모든 그란 시리즈를 즐긴 열혈 게이머 중의 하나다. 한때 그란의 제작자 '야마우치 카즈노리'를 주축으로 설립한 '폴리포니 디지털'에 입사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초현대식 자동차 공장을 방불케 하는 게임 제작 환경과 실제 자동차 외관뿐만 아니라 세부 세팅, 배기음, 주행 질감까지 재현하려는 그들의 장인 정신에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챌린지 미션이 떠오른다. 원형 트랙을 벗어나지 않고 최소한의 핸들링과 브레이킹으로 랩타임을 겨루는 미션이었는데, 새벽 3시까지 도전을 해도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간발의 0.2초 차이로 실패하고는 분통이 터져 패드를 방 한구석에 던져 버린 적도 있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성공했을 때 그 희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깜깜한 새벽에 로지텍 레이싱 휠에 입을 맞추며 환호를 내질렀으니 말이다. 리얼 레이싱이란 스치는 찰나의 감각에 의지해 정밀한 순간 조작을 하는, 급가속과 함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피지컬 한 스포츠란 것을 절감했다. 난 태생적으로 레이서의 길을 달리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그란은 자신이 재능을 타고난 진짜 스피드 레이서인지, 방구석 게이머로 만족해야 할 덕후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기준선이자 바로미터, 통과 지표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비록 게임 속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무일푼의 레이서가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역사에 남을 명차들을 얻어 차고를 확장한다.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일주하며 유수의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여 포인트를 쌓고, 포디엄에 올라 샴페인을 뿌리는 영광을 누린다. 자신이 최애 하는 차량을 자유자재로 튜닝하고 세팅하여 원하는 트랙에 올려 드라이빙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온몸을 끌어당기는 마력처럼 다가왔다. 하루라도 그란을 잡지 않으면 애차에 올라 가상의 레이싱을 즐기는 공상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일종의 금단 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회사 내 직급이 대리에서 과장, 이어 차장으로 높아지면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들이 연이어 태어나면서.. 눈이 침침해져 밤을 새워 게임에 빠져들기 버거워지면서.. 그란 시리즈는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그란투리스모 시리즈 출시 25주년 기념, 그란 7 오프닝 영상. 자동차 역사 100여 년을 관통하고 압축하는 스토리텔링이 압권이다.
2010년, 플스 3와 함께 마련한 그란 5는 30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가이드와 특전 차량 그리고 실제 영화와 다름 없는 오프닝으로 유명했다. 당연히 난 한정판 패키지를 소장했다. APEX 매뉴얼은 중요 포인트에 밑줄까지 치며 정독했지만 정작 게임에 빠져들기가 어려웠다. 화면 전환 시 로딩 시간이 너무 길어 드라이빙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빠졌고, 바쁜 일상 중에 긴 시간을 투자해 게임에 몰입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그란 5 박스는 책장 어딘가에 처박혔고, 점차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마지막 콘솔인 플스 3는 티브이 옆에서 블루레이 플레이어로서 일부 기능하다가 결국 전원이 꺼진 채로 오랜 침묵에 빠졌다.
2010년 출시된 그란 5 초기 한정판 패키지라 기억한다. 언젠가 플스 3의 잠을 깨워 재도전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영구 소장 중이다.
언젠가부터 유튜브에서 '그란투리스모' 실사 영화 예고편을 첫 페이지 섬네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그란에 빠진 레이싱 게임 덕후가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제 레이서에 도전하면서 겪는 고난과 불의의 사고를 보여준다. 이를 극복하면서 가상의 레이서를 벗어나 현실에서도 리얼한 레이서로 자리 잡는다는 진부한 스토리 흐름과 클리셰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최근 전체 영화를 감상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가상의 게임과 실사 영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아우르는, 자연스러운 연출 효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초반부 카시트에 앉아 그란 르망 레이싱에 참가하는 순간, 카 프레임과 부품이 덧씌워지면서 전체 트랙을 후방 관찰자 시점으로 추격하는 신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다.
자동차와 레이싱의 디테일에 몰입하고 천착한 게임의 전적을 따라 영화 또한 세부적인 묘사와 재현에 집중한 흔적이 역력하다. 코너에 돌입한 경쟁자의 틈을 노려 추월하는 장면에서 레이서의 2단 다운시프트 조작 시, 차량의 내연 기관과 주요 부품의 기민한 반응이 역동적이다. 차량 충돌 시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파편과 제멋대로 구르는 휠타이어, 방호벽과 부딪혀 폭발하는 차체 등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레이서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악명 높은 뉘르부르크링 서킷
독일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 서킷의 사고 지점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들은 일종의 묘비처럼 우뚝 서 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인공 '잔 마든보로' 역시 이 서킷의 악명 높은 언덕길 구간에서 비극적인 사고를 겪는다. 닐 블롬캄프 감독은 양력과 체공력을 이기지 못해 상공을 비행하다 전복되는 차량과 아수라장이 된 내부 모습을 근접 촬영하며 자세히 보여준다. 관객들이 그날의 사고를 생생히 경험하게 하고, 레이서가 겪는 트라우마의 일부를 간접 경험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잔이 진정한 프로 레이서로 거듭나기 위해 돌파해야 하는 심리적 갈등과 분투에 주목한다. 조력자로 등장하는 '잭 설터'는 과거 르망 레이스 도중 벌어진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한 미케닉 겸 레이싱 감독이다. 그의 인내심과 배려, 진심 어린 도움이 없었다면 잔은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다시는 트랙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고, 이 영화 또한 제작되지 못했으리라.
후반부 '르망 24시 레이싱'은 시작부터 현실 고증에 철저하다. '라 마르세예즈'를 떼창 하는 관중들과 헬기에서 강하한 전투병들이 프랑스 국기를 전달하는 게양식, 이를 지켜보는 트랙에 도열한 참가 레이서들의 모습은 엄숙하기 그지없다. 죽음을 각오한 라이벌 레이서들의 견제,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와 심야의 어둠과 함께 시시각각 밀려오는 피로와 졸음을 뚫고 잔 마든보로는 '방구석 Sim-레이서'라는 조롱에서 끝내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어떤 인간 승리를 거두고, 현실 레이싱 세계에 안착하는지.. 우리 모두 지켜보기로 하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실제 잔 마든보로는 영화 속에서 스턴트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리얼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폴리포니 디지털. 레전드 게임 제작자 '야마우치 카즈노리'가 그란투리스모 시리즈 제작을 진두지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