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다큐 <Tour de France: Unchained>의 일부 장면을 모티프로 쓴 글입니다.
출발 라인에 선 백여 대의 레이싱 사이클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원반 모양의 휠타이어는 접지면을 최소화하기 위해 칼날처럼 벼려져 있고, 프레임은 경량화를 위해 불필요한 장비를 모두 떼어냈다. 그 위에 올라탄 깡마른 체격의 선수들은 공기 저항을 고려한 라이크라 유니폼을 입은 채 페달에 발을 걸고 있다.
3, 2, 1.. 환호성과 함께 노란 져지를 입은 탑 시드 선수를 위시하여 선두 그룹이 페달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뒤를 따르던 후위 그룹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어 '펠로톤'을 형성한다. 팀원들은 자신의 팀 리더를 보호하기 위한 다이아몬드 대형을 이루며 전방에서 밀려오는 강풍과 분진을 후류로 밀어낸다. 빈틈없이 밀집한 사이클과 선수들은 나름의 간격을 유지하며 앞으로 튀어나갈 기회를 노린다. 조그만 실수라도 저지르면 밀집 대형이 와르르, 붕괴되며 대형 사고를 면하기 어렵다.
5km쯤 지났을까. 프랑스 외곽의 포장도로가 점차 거칠어지더니 울퉁불퉁한 자갈길이 나타난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제부터 지옥길이다. 악명 높은 돌길을 시속 60km로 돌파하려는 과감한 바이크 레이서 두엇의 바퀴가 서로 엉키나 싶더니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나동그라졌다. 돌발 사고다! 쏜살같이 우측으로 몰리며 사고 현장을 피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경쟁자들. 사고자의 동료 팀원들은 속도를 늦추고 그들의 상태를 살핀다. 누구는 팔꿈치가 깊게 파여 피를 뚝뚝 흘리고, 다른 이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절뚝거리며 길가로 피해 쓰러진다. 프레임과 체인, 휠이 뒤엉켜 휘어진 고철 더미가 된 사이클은 곧바로 도착한, 지원 차량의 루프탑에 실린 여분의 사이클로 교체된다. 사이클 레이서들이 3주 동안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 멀쩡한 상태로 완주하는 것은 로또 1등에 버금가는 행운이다. 한 스테이지에 몇 번의 낙차를 겪으면서 피가 철철 흐르는 찰과상에 근육/인대 손상쯤은 일상 다반사 취급이다.
행운의 여신 티케가 외면한 누군가는 어느 스테이지 막판, 전력 질주 구간에 돌입하자마자 몸싸움에 밀려 광고 입간판 너머로 몇 바퀴를 구르며 떨어졌다. 곧바로 정신을 잃은 그 선수는 나흘 후에 깨어나 자신의 부상 정도를 확인하고는 낙담했다. 이빨이 10개나 부러졌고 아래 턱뼈가 날아가서 음식 섭취가 불가능했다. 다수의 뼈가 골절되어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1년 넘게 험난한 재활 끝에 복귀한 그는 여전히 팀 리더로서 선두에 선다. 막판 스프린트 구간에서 기어를 낮추고 튀어나와 선두 추월(Break Away)을 서슴지 않는다. 오늘은 일진이 좋은 거 같아. 거듭된 낙차 사고에도 그는 휩쓸려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생존했다. 스테이지 결승 라인을 300 미터 남겨두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서넛의 경쟁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각축을 벌인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제정신이라면 저 펜스 밖에서 열띤 응원을 하고 폭죽을 터뜨리다,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진탕 마시는 게 현명한 짓 아닐까. 그는 한순간 밀려드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안장에서 상체를 들어 올려 앞으로 내밀고는 맹렬히 페달을 밟았다. 좌우로 오락가락하며 진자 운동을 하는 사이클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핸들을 단단히 부여잡고 그는 속으로 외쳤다.
- 이건 제대로 미친 자들의 축제야. 피학과 가학을 넘나들며 극한의 고통을 즐기는 자들의 레이싱이라고.. 가냘픈 두 바퀴에 온몸을 맡긴 채, 시속 100 km로 내리막길을 질주하며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해 더티한 몸싸움에 심리전도 불사하는, 광란의 질주임에 틀림없어.
그는 타고난 '스프린터'였다. 피날레 직전 극심한 두통과 사지의 근육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엄습했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진 채, 진땀을 흘리며 선두를 다투는 저들도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견디며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고 있기에.. 그는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승선 1미터를 앞두고, 본능적으로 앞바퀴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었다. 순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동안 페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이대로 발을 멈추면 쿵쾅대는 심장이 견디다 못해 몸 밖으로 탈출해 펑, 폭발할지도 몰라..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펜스 가까이 사이클을 붙이고는 속도를 점차 줄였다. 몸 구석구석 뻗은 혈관을 흐르던 모든 피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펜스에 기대어 옆으로 쓰러지듯 무너지는 그를, 주위의 관중들과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가까스로 부축했다. 그는 흙먼지와 아스팔트 검댕이 덕지덕지 묻어 거뭇해진 얼굴을 들어 자신을 감싸 안은 코치를 바라보았다.
- 여기가 알프 듀에즈(Alpe d'Huez)인가요?
- 빌어먹을, 우에즈 산 정상이야. 넌 지옥에서 막 벗어나 지상 천국에 발을 들인 거라고..
- 후우, 이 정도면 성공적인 컴백 아닌가요?
코치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 성공? 대성공이고 말고.. 여기는 진정한 정상이 아니지. 이따 저 포디움 높은 곳에 올라 메달을 걸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 거야. 내리보는전망이 끝내줄 테니까..
'포디움'이라는 말에 그는 펜스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과 한 몸이 되어 달린 사이클의 안장과 밋밋해진 타이어를 쓰다듬었다. 타이어 표면은 그의 심장처럼 뜨거웠다. 하마터면 손 끝에 화상을 입을 뻔했으니..
그는 품에 안은 사이클을 양팔로 들어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제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를 둘러싼 카메라의 플래시가 연이어 터지고, 관중들의 환호성이 한층 커졌다. 그는 그렇게 천국의 정상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보였다.
세계 최대의 로드 사이클 축제, 'Tour De France'의 파란만장한 스테이지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