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mio babbino Caro(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칠흑을 두른 바다를 울린다.
그녀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가 수면 아래 미지의 존재를 깨운 걸까?
정체 모를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 배 안의 스패너, 컵 등을 훔쳐가고 한바탕 소동을 겪은 끝에 축음기는 바다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2021년 개봉한 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루카>의 오프닝이다.
(우리가 으레 기대하는, 소소한 단편 없이 바로 본편이 시작하는 네 번째 작품이란다.)
주인공은 상상 속 인어를 닮은 귀여운 아이 '루카'. 바다 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그는 인간처럼 말을 하고 물고기 떼를 방목하지만, 자신을 바다 괴물이라 터부시하고 적대시하는 인간들과 마주치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루카는 우연히 '알베르토'라는 친구를 만나 차츰 두려움을 떨쳐내고 세상 밖으로 나와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여 베스파를 타고 여행을 하겠다는 목표에 도전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함께 경기에 출전하는 '줄리아'라는 빨강 머리 당찬 소녀와 우정을 다지게 되고, 그녀를 사이에 두고 알베르토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바다 수영 + 파스타 빨리 먹기 + 자전거 타기라는 철인 경기가 마을에서 펼쳐지는 날, 아이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괴롭히는 왕재수 밉상 라이벌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루카와 알베르토는 물만 닿으면 바다 괴물로 변하는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 세상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지가 이야기의 큰 줄기다.
여기까지만 듣고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뻗어나갈지 예상되는 뻔한 전개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건 픽사의 작품이다.
1995년 <토이스토리>를 시작으로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애니를 자그마치 24편이나 제작한 픽사의 손길이 고루 닿은 작품이니 믿고 보라는 얘기다.
픽사는 종種을 뛰어넘은 아이들의 우정과 공존의 가능성, 성장기를 얼기설기 끼워 맞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그야말로 이탈리아에서만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크린 안에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조그만 원형 분수가 놓인 마을 광장, 광장을 중심으로 층층이 뻗은 석조 주택들, 골목길 사이사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할머니와 축구하는 아이들, 그들이 정신없이 뱉어내는 리비에라 지방 방언과 즐겨 듣는 노래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어 현지 토박이들마저 감탄할 만한 영상으로 빚어냈다.
이 정도 작업을 해내려면 어린 시절을 이런 환경에 둘러싸여 지낸 이들이 한데 모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작품을 아우르는 역할을 맡은 50대에 접어든 Enrico Casarosa 감독. 그는 이탈리아 제노바Genoa 에서 태어나 자란 자신의 온갖 경험과 그리운 추억들을 녹여내 애니메이션이라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수정 그릇에 가득 담아냈다.
<루카>의 배경은 이탈리아 동남부 포르토로소(Porto Rosso)라는 바닷마을과 인근 지중해이다.
작품을 보고 나서 구글 지도에서 실제 지명을 찾아 사진을 둘러보면 "오 맘마미아, 산타 모짜렐로!" 연신 감탄사를 내지를 수밖에 없다. 애니의 주요 장면 하나하나가 눈앞에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 하니 말이다.
사람으로 변한 알베르토와 조우하는 U자형으로 움푹 들어간 해변,
눈을 시리게 하는 코발트색 바다와 그 위로 비죽 솟은 갖가지 바위섬들,
시간을 들여 주의 깊게 찾아보면
루카와 알베르토가 숨어 지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는 지붕 없는 원형 석탑과
자의가 아닌 반강제적인 힘?에 의해 차례로 아이들이 뛰어드는 아담한 석조 분수도 찾을 수 있으리라.
나중에 연이 닿는다면 직접 가보기로 하고 구글맵 위에 깃발 꽂기 완료.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마을 골목길 구석에 무심히 세워진, 말벌을 닮은 진녹색 베스파는 해풍에 녹이 슬어 과연 이것이 제대로 굴러갈까 싶다.
육지로 올라온 루카와 알베르토가 머무르는 줄리아의 집으로 발을 들이면..
오른팔을 잃은 널따랗고 둥그런 턱이 인상적인 아빠는 강건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잔정이 많은 이태리 반도 사내들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가 직접 요리하는 파스타 한 그릇은 어떻고.
이태리 가정집에서 오늘처럼 날씨가 궂은날에 시금치, 바질 등 묵은 채소와 엊그제 잡은 해산물을 털어 넣고 한 솥 끓여낸 트레네테 파스타가 투박한 접시에 툭 담겨 나온다.
루카와 알베르토의 정체를 일찌감치 눈치챈 얼룩 고양이를 찬찬히 뜯어보라.
주인을 빼닮은 두툼한 콧수염을 실룩이며 아이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고양이 이름은 무려 '마키아벨리'.
이름대로 뭇사람 말은 깔끔히 무시하고 지가 상전 아니 군주처럼 굴려하는 맹랑하고 엉큼한 놈이다.
부두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고깃배들, 황토와 같은 붉은 흙을 처바른 집집마다 그 앞에 던져진 노와 그물, 튜브 그리고 사이사이 형태를 달리하는 돌을 끼워 맞춰 촘촘하게 올린 돌담이 정겹기 그지없다.
이처럼 픽사는 관객들이 공간 이동을 통해 이탈리아의 어느 바다 마을에 난데없이 떨어져 살아가는 것처럼, 그 생생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데 온 역량을 집중했고 (이전 작품들처럼) 무난하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루카>를 감상하는 최적의 방법은 가능한 큰 스크린을 택하는 것이다. 암전된 극장에서 리액션이 풍부한 아이들에 둘러싸여 함께 본다면 더욱 좋겠다.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잘한 디테일들을 아이들이 순간 캐치해 깔깔대고 박수를 치는 걸 보고 감탄할 수 있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주위에 없어도 극장 안이 텅텅 비어도 상관없다. 홀로 떨어져 보더라도 나름의 고유한 경험과 재미를 선사하니까 말이다.
연푸른 지중해의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동글한 자갈을 밟고
어린 시절 그토록 동경하던 나무 위 이층 집에서 친구와 밤을 새우고
이태리의 국민 스쿠터 베스파를 타고 샛노란 유채밭을 달리다 하늘로 날아오르고
저 밤하늘을 건너 우주를 날아 토성의 둥근 띠를 따라 무한 질주하고
걷는데도 익숙지 않은 아이가 부단한 연습을 통해 급경사를 무릅쓰고 자전거를 내리굴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해내고 악당들(Evil Empire)을 무너뜨린다.
다르다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마침내 종착역에 다다르면..
루카의 기나긴 모험을 함께 겪고 나면 우리는 어느새 기차 정거장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보다 넓은 세계로 뛰어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앞길에 행운을 빌어주겠지.
"네 마음 어딘가 숨어 널 포기하게 하고 멈추게 하는 '브루노'에게 닥치라고,어서 꺼지라고 외치는 거야."
"너는 네 길을 가도록 해. 난 나의 길을 걸어갈 테니. 난 여기서 널 기다릴 거야."
기찻칸에 오르는 루카에게 건네는 알베르토의 뜻 모를 덕담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숨어있지 않을까?
남과는 다른 아이의 앞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길.
비록 '언더독'이라 놀림받고 무시당할지라도, 그들과 나란히 길을 걷는다면 루카는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마음껏 헤엄치고 달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를 보다가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글 남깁니다.
- 루카와 알베르토가 벼랑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기 전, 백미러에 붙여놓은 흑백사진 속 콧수염 달린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감독의 아버지는 아닐 테고, 아마도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루돌프 발렌티노, 마르첼로 마스트로안니와 같은..)가 아닐까 싶은데 누구일까요?
- 마을에서 루카의 아빠가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Attacco del Mostro Marino"라 적혀 있는)를 보고 '우고 형?"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해저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고전 영화인 듯한데 만약 실제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 제목 등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 마지막 장면에서 알베르토가 떠나는 루카의 손을 붙잡고 나중에 배워서 알려달라는 짧은 이태리 말의 뜻이 궁금합니다. 아마도 관객들이 나름대로 해석하도록 여지를 준 듯한데요. 발음 상으로 "피어체데 제라르모 트론베타.." 라고 들립니다.
제가 발견한 깨알 같은 장면들이 있는데요.
루카의 엄마와 아빠가 분수대 앞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장면을 유심히 보면 오른쪽 벽에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La Strada(길)>, 이탈리아가 낳은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54년 작품이죠. 앤서니 퀸과 젤소미나 역을 맡은 줄리에타 마시나가 열연한 작품입니다.
배경이 이탈리아인만큼 국민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해 오마주하는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네요.
분수대에 아이들이 던져져 허우적대는 장면을 보고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요? 고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걸친 아니타 애크버그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가 내려다보는 트레비 분수에 뛰어들어 연인 마르첼로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또한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은 어부들이 거대한 가오리를 닮은 정체불명의 바다 생물을 그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루카>의 핵심 줄거리와 묘하게 겹쳐지는 이미지라 감독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