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신랑은 10년 연애 동안 싸운 적이 10번 안쪽으로 거의 싸울 일이 없었다. 왜 안싸웠냐고 묻는다면 글쎄 우선 둘다 성격이 무던하다. 크게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고 또 상대를 이해하려는 심성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둘다 맏이인 탓도 있는듯하다. 싸워도 언성을 높여보거나 한 적은 없다. 그만큼 둘 다 남들이 보면 답답할 수도 있는데 많이 참는 성격이란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우리가 부쩍 싸움?, 싸움이라기보다 묘한 기류가 흐르거나 서로에게 차가워질 때가 있는데 아이를 낳고부터다. 차가워진다는 건 내 일방적인 감정일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를 낳고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됐는데 10에 9은 내 쪽에서 불만을 제기한다. 늘 같은 이유다. '왜 나만 하느냐'다. 많은 과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육아휴직 중에는 밤에는 내가 아이를 보는게 당연했고, 또 복직을 하고 나서도 아이에 관한 건 내가 챙기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첫째를 낳고 복직을 하고, 그때를 떠올려보면 내가 내 삶을 산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필 인사도 제일 빡세다는 정치부로 가서 일도 많았는데, 비슷한 시기 신랑은 이직을 했다. 내가 일이 많다고 해도 이직을 한 사람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에 집안일이나 육아의 부담이 내게 있다는 것도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후배가 내게 묻는다 "선배, 저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일과 육아를 다 하느냐. 너무 신기하다"라고 물었다. 그냥 그 후배는 별 생각없이 한 질문인데, 어찌보면 아이를 낳기 전 여성들이 워킹맘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는데 그 말에 "글쎄, 나도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다 그때 알았다. 나의 하루하루가 진짜 치열하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일에 대한 생각과 가정에 대한 생각이 완전 뒤죽박죽이었다.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 반찬준비 , 어린이집에서 오는 알림장, 매일 아침 챙겨야 하는 어린이집 준비물을 비롯해 회사는 회사대로 바쁜 부서였기에 정신없이 돌아갔다. 내 머릿속에는 그때그때 닥친일을 처리하는데 익숙해졌고, 나에 집중하거나 나를 돌아보거나 사색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러다 둘째를 갖게 됐고, 다시 육아휴직을 들어가게됐다. 이제 겁이났다. 아..또 나 혼자 아이를 봐야 하는 건가. 나는 앞서도 말했지만 친정이 멀고 시어머니는 결혼 1년차에 돌아가셨다. 그런 연유로 정말 독박이었다. 동네도 내가 살던 동네가 아녔기에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다시 맨날 눈물로 지새우던 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냥 이모님을 파트타임 형식으로 쓰기로 했다. 육아휴직 중 나오는 돈은 그냥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모님은 오후 4시~8시까지만 썼다. 아침에는 아이 둘을 케어하며 큰 애 어린이집을 보내고, 그 이후에는 둘째 케어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모님이 오후에 오시면 그때부터 첫 아이와 노는데 집중했다. (왜 큰 애와 노는데 집중했는지, 그 과정은 또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것 같다) 암튼 돈으로 도움을 받았고, 그때 사실 죄책감도 컸다. 내가 이 돈을 써도 되나. 사실 우리 형편에...이모님을 쓰는게 가당키나 한가 싶으면서도 내가 살기 위해 어쩔수 없었다. 신랑도 첫 애를 키울때의 경험이 있던 탓에 이모님을 쓰는데 대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그 짐을 덜 수 있다는 생각에 반겼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은 버텼다. 그리고 다시 복직을 앞두고 예전에 내가 복직을 하고 생활한 1년 10개월의 일상을 떠올리며 신랑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이제 정말 육아는 같이해야 하는 것이다. 육아 주체가 내가 아니다. 당신도 동등한 육아 주체가 돼야 한다. 아이 알림장도 같이 봐야 한다고 주지시켰다. 은성이 낳고 복직중에 (앞에 말한것처럼 당시 나는 정치부에 배정됐고, 유례없는 벗꽃 대선을 치를 때였다) 아이가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알림장을 당일 아침에 본 것이다. 소풍을 간다는건 알았는데, 매번 어린이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줬기에 신경을 안썼는데 그날은 집에서 싸가는 날이었다. 그때 집에 있는 과일과 쥬스, 과자등을 있는대로 챙겼고 김밥대신 주먹밥을 싸서 집에 있던 스텐 통에 담아 보냈다. 그때 너무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두고두고 육아는 같이 하는 것이라는데 일종의 신념을 주게 했다. 그 때의 일은 신랑도 기억한다. 신랑에게도 알림이 갔는데 둘다 안챙긴것이다. 신랑은 본인 일이라 생각을 못 했을것이고, 늘 내가 챙겼기에 알림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은재 낳고 복직을 앞두고 그때의 일을 상기하며 알림장도 매번 챙겨야 한다고 알렸다. 신랑은 자신도 그때 이후 반성을 하게 됐다며 다짐했다.
복직 후 4개월이 지난 어느날, 쌓였던 게 폭발했다. 다시 원점이었다. 어린이집 관련된 일, 아이 반찬, 모든 걸 내가 하고 있었다. "하루 일과중에 아이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해? 일과 양육이 몇대 몇이야?" 라고 묻자 신랑은 답을 하지 못했다. 하필 신랑은 또, 내가 복직을 할 시기에 이직을 했다. 안정적인 대기업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며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 이후 퇴근은 늘 9~10시가 다 돼서야 왔다. 나도 복직하고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10년째 다닌 회사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또 육아에 관한 건 내가 전담하는 상황이고, 신랑에게 쉽게 시키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일과 육아가 몇대 몇인거 같아?" 라고 묻자 "신랑은 5대 5인것 같아" 라고 했다. 그때 울면서 말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난 모든걸 다 포기하고 내려놓을것 같다"고 말했다. 그 날부터 아예 규칙을 정했다. 일주일씩 번갈아 가며 아이 알림장을 챙기고, 반찬도 일주일씩 당번처럼 하기로 했다. 그 대화를 나누고 열 달이 지났다. 하지만...또 다시 제자리.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규칙을 정해도 신랑은 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아마 알게모르게, 일의 순서에서 밀려있을 것이고, 나는 일의 순서에서 아이들에 대한 일이 앞으로 당겨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요즘 코로나때문에 아이들의 하원이 당겨지면서 이모님을 집에 보내야 하는 시간도 당겨졌다. 그런데 늘 내가 일찍 와서 이모님을 보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주일에 3번은 내가 일찍 와서 이모님 보내드릴테니 2번은 신랑에게 일찍 오라고 했다. 하지만 신랑은 자발적으로 일찍 온 적이 없고, 매주 매일 내가 그 사실을 주지 시켜야 했고, 지난 화요일에는 신랑이 일찍 오기로 한 날인데 7시쯤 연락을 하니 아직 지하철 타고 오는 길이란다. 그때 화가 폭발했다. 그럼 미리 얘기를 해야지, 그럼 나라도 집에 일찍 가서 이모님 보내드릴 것 아니냐고 물어부쳤다. 신랑은 미안하다며 그나마 이것도 말을 중간에 끊고 나온 것이라고 핑계를 댔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고 이모님을 보내드렸다. 너무 화가 나서 다음주 내내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근데 그건 힘들다는 것이다. 그날 그날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데 그렇게 무 자르듯이 약속하기는 어렵고 상황에 따라 하자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 늘 내가 일찍 들어와야 하지 않냐고 따져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며 전화가 왔다. 일찍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확답을 못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쯤에서 그만두자 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빡빡하게 규칙을 정하냐, 되는 사람이 하면 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험해보니, 되는 사람이 하면 되지라고 하면 늘 한명만 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책모임을 하는 한 엄마가 같은 일로 신랑에게 월수금, 화목 이런식으로 집안일 분담을 정했는데 그 남편도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구느냐"고 했단다. 그래서 그 엄마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일을 안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게 내 일이 되면 그런 얘기 안나온다"라고 받아쳤다는 것이다. 그때, 무릎을 딱쳤다. 그래. 늘 내 쪽에서 규칙을 정하자고 제안하고, 하는 것이 내가 그 일을 전담해왔고, 그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상대방은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담의 필요성을 못 느겼던 것이다. 그래서 더 구체적으로 규칙을 정하기로 했다. 어떻게 될지 경과는 다음에 또 적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