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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참말이여!

by 틈과경계

여성들이 모여 노래 부른 연행 현장은 그들의 노동과 관련된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이경엽 선생님은 일과 놀이가 어우러진 생산문화의 현장으로 길쌈 두레가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길쌈 두레에서 여성들은 서로 음식을 나누며 노래와 놀이를 연행했다고 말입니다.


노래는 주로 같이 일하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불렀습니다. 들게방, 물레방, 모시방과 같은 길쌈 두레는 이러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농촌에서 형성된 공동체 가운데 길쌈 두레는 아주 중요한 공동체였습니다. 50~60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활발한 생산 활동을 담당하던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게는 품앗이와는 다른 노동 형태로 이루어지던 조직적인 노동 공동체였습니다. 품앗이가 개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교환노동, 즉 보리방아 찧기, 밭작물 파종, 수확, 밭매기 등이었다면 두레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공동의 노동 형태였습니다. 삼 둘게는 또래별로도 이루어졌는데 12~13세의 처녀 모임, 며느리의 중년 모임, 시어머니와 같은 나이 든 여성들 모임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다만 30~40여 호 미만의 자연 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노동을 했습니다.


들게는 주로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 모인 여성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불렀습니다. 길쌈은 일의 양으로나 시간으로나 끝이 없고 지루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불규칙적이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일을 할 때면 노래가 필요했습니다.


전남 지역에서는 두레가 아닌 품앗이 일판에서도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부녀자들이 모여서 미영밭이나 콩밭을 매면서 시집살이 노래와 같은 말(노랫말)이 위주가 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서영숙 선생님은 김필순(옥갓, 당시 50세)은 “길쌈 품앗이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라는 현장 조사를 경험을 언급했습니다. 장순남(옥갓, 당시 73세)은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고 다니면서 해 넘어간 것도 모르고 일을 했고 오히려 점심때가 된 것이 웬수”였을 정도라고 증언했다고 하네요(이 기록은 모두 40년 전 자료입니다). 밭을 맬 때 “오늘은 누구 밭, 내일은 누구 밭” 하면서 다녔다고 하니 그들의 연대감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됩니다.


열 명, 열두 명, 대여섯 명씩 짝지어 품앗이를 하는 현장에서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둥당애 타령을 부를 때처럼 한 사람이 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이 이를 받아 제창하는 식으로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이루어 부르는 노래와 달리 전남 지역에서는 혼자서 밭을 매면서 부른 노래도 있었답니다. 바로 <흥글소리>라는 노래입니다(<흥글소리>에 관한 추가 이야기는 다른 연재를 통해서 하겠습니다).


엄매엄매 우리엄매/뭣할라고 날 밸 적에/토란나물은 즐겼던가/돌아갈수록 더 서럽네

엄매엄매 우리엄매/뭣할라고 날 밸적에/까지노물 즐겼던가/갖가지로 더서럽네

논에가면 가래웬수/밭에가면 바라구 웬수/집에 들먼 쓰누 웬수/시 웬수를 잡아다가

마당간데 닙혀놓고/밍천한 하나님네/베락이나 때립소사/물레야 굴동아 뱅뱅돌아라


강원지역에서는 삼베길쌈을 하면서 할머니에게서 <형님형님 사촌형님>과 같은 노래를 배웠다는 제보자들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제보자들도 있었습니다. 경남지역에서도 저녁이 되면 부녀자들이 삼을 삼으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12~13세에는 어머니, 언니와 일하며 불렀다고도 합니다. 어떤 분은 시집을 가서 야단을 맞게 되면 혼자 콩밭으로 가서 어른에게 안 들키도록 몰래 살살 노래를 불렀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시집살이 노래는 여성들의 일과 유희가 어우러진 노동 현장에서 불리기도 하고 혼자서 숨죽여 부르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노래였습니다. 놀래가 불리는 장소와 노래 부르는 방식에 따라 노래의 말(사설)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습니다. 혼자 부르는 노래에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체험을 담았을 것이고, 여럿이 부르는 노래에는 이미 알고 있던 노랫말들을 불러가면서 변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집살이 노래는 여성이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불렀던 사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한 노래였습니다. 척박한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분노를 삭이기 위해,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불렀던 스스로를 위한 노래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환경에서 절박하게 불렀던 생존의 노래라고 하면 어떨까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굴레에 사는 여성들이 은근히 많습니다. 십여 년전 전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방>이라는 카페의 익명 게시판에는 집안 제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시어머니와의 갈등, 친정 부모와 시댁 부모의 용돈을 차별하는 남편에 대한 불만, 시누이에 대한 불만 등 시집살이 노래에서 목격했던 유사한 상황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지내고 보니 혹시라도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힘들어하는 여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살던 나이 든 여성은 mz세대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나름의 고충을 이야기하기도 하죠. 며느리살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꼭 시집살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일부(고집스럽고 힘이 센)가 집착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만을 위한 노래가 필요합니다.


노래는 참말이여라고 증언했던 당시 그분들의 이야기는 진실을 기반으로 한 증언이었습니다. 노랫말의 기능을 잘 이야기 해줍니다. 저에게도 참말같은 이 노랫말의 진실이 절실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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