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틈과경계 Oct 14. 2024

세습자본주의에 관하여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수업에서 다룬 글 한 편. 학생들은 내용에 깊이 공감했지만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세습자본주의의 폐해를 끝내는 일은 정치적 개혁으로 가능하다는 필자와는 달랐다. 세습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그들만의 시각으로 짚어냈다. 그저 순응하고만 있지는 않고 있구나. 희미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글쓴이가 의도했든 그러하지 않았든 청년에게 주는 충고는 성공한 셈이다.


필자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 일은 흔하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실, 통계자료를 통해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의미 있는지를 아는 경우도 많다. 누가 읽느냐에 따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글이 제공하는 정보는 다른 의미로 덧입혀지곤 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런 역설이 발생한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읽고 판단해 보시라~



청년에게 주는 세습 자본주의의 충고


한겨레 2024.09.02.00

윤홍식(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한국의 부·모처럼 자녀 교육에 진심인 사람들은 전 세계에 없다. 자녀가 수능 점수(또는 내신 등급)가 높은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자녀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기득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입학한다고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이 점에서는 부자 부·모와 가난한 부·모 간에 차이가 크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가구도 자녀 1인당 사교육비로 소득의 무려 27%를 지출한다고 한다. 가난한 가구가 이 정도면 거의 모든 부·모가 자녀의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자녀의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거는 부·모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자녀가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는가? 만약 자녀가 그런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면, 진학할 가능성이 적다면, 자녀가 공부하지 않았다고 탓하지 마라. 부·모 탓이요, 부·모 탓이요, 부·모의 큰 탓이다.

  솔직해지자. 어려운 일이지만, 자녀가 그런 대학에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부·모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다. 자녀를 탓하지 마라. 실제로 최근 한국은행은 “소득 상위 20%와 하위 80% 간 전국의 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와 서울 소재 8개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 격차의 75%는 개별 학생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 차이에 의한 결과”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더욱이 서울과 비서울 간 서울대 진학률의 차이 중 무려 92%는 부모의 경제력과 거주지역의 사교육 환경 등에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의 보고서만이 아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중 65.1%가 소득분위 9·10 분위인 고소득 가구의 자녀였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의 배경을 보면 더 놀랍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을 기준으로 서울대 의대에 재학 중인 학생의 80%가 소득 9·10 분위 가구의 자녀였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중의 비율이니, 전체 학생으로 확대하면 고소득 가구의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생전에 내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제대로 된 부모를 고르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2024년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겐, 스티글리츠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어도, 본인만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고,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사회에서 저소득층이 평균소득으로 이동하는 데 150년이 걸린다고 했다. 2024년 가난한 집에 태어난 한국인이 평균소득에 도달하려면 2174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최근 소득 불평등과 상대 빈곤율 등 일부 사회지표들이 개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한 사회,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더 열심히 노력해 더 좋은 스펙을 쌓으라고? 그래도 100명 중에 한두 명은 열심히 노력해서 계층 상승을 했다고 희망을 줘야 할까? 세상에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다면, 체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지는 않다. 핀란드에 살고 있는 청년 중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신의 성공에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에 그쳤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핀란드가 처음부터 그런 나라가 아니었고, 핀란드인의 유전자엔 특별히 ‘평등 유전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결국 지금 우리가 직면한 참담한 현실은 우리,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부·모가 청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고 혁신을 기대하겠나. 망국만이 남아 있다. 부·모를 선택할 순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살고 싶은 나라로 만들 순 있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대에,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세습되는 세습자본주의를 대신할 믿을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전 16화 도덕 손상을 피해 갈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