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사 Mar 05. 2024

나는 누구인가?


2021년 8월 5일을 기점으로 나의 삶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모든 것이 무겁고 견디기 힘든 일뿐이었다. 그러면서 사실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가 누구인가?” , “나는 어떤 사람인가?”였다.      



냉정하고 강하게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아는 나는 유리멘털을 가진 조바심 많고 소심한 겁쟁이이다. 내게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일이 밀리는 게 싫어서 빨리빨리 해결해야 하고, 누구와 비교되기 싫어서 남의 눈치를 보지도 않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싫은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 문제해결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혼나고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성실해졌고 성실함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미움받을 용기’가 없기에 무언가를 놓치거나 실수를 하게 되면 순발력이 없다 보니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나는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최소한 중학교 때까지는.     


대학 1학년때 한 번은 미팅을 나갔는데, 국민학교 동창생 남자아이가 나왔다. 내가 너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3번이나 같은 반을 했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자기는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후 국민학교 동창생들이 모이는데 한번 나오라는데 거절해 버렸다. 어차피 그들의 기억엔 나란 사람은 없는데 굳이 기억을 조작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소심하고 존재감 없던 내가 변화된 것은 내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해서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엄청난 자존감은 아니었지만, 나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없는 상황에서 변화하고 싶어서 대학 1,2학년때는 요란한 화장과 어울리지도 않는 파머머리에 눈에 띄는 옷을 입고 다녔다. 나에겐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었고, 점차 나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취향을 알게 되면서 현재의 내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을 싫어하는 독특한 취향이 있다. 남들을 따라 하고 행을 쫓는 것도 싫고 나만의 취향과 신조를 가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인생은 변화될 수 있고, 인내와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그날 전까지는!     


그러나 나에게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겁쟁이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싸움이 싫어서 회피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기 위해서 도전을 하지 않은 적도 많다. 이리저리 확인해 보고 나의 ‘ego’가 다치지 않는 방법으로 나는 합리화를 택했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온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처럼-여우가 포도나무 아래를 지나면서 맛있어 보이는 포도를 먹으려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봐도 가능하지 않자 ‘아마 저 포도는 엄청 실 거야’ 라며 돌아선다-  나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내가 나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도 남이 나를 다치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매번 그런 상황을 회피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그저 조바심이 나서 혹시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강박적으로 빨리 과제를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 조바심과 미움받지 않으려는 유리멘털 때문에 집안일이나 학교일에 게을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랬더니 X에게 난 일 잘하는 집사 혹은 돈 받지 않고 일하는 비서였던 것이다. 앞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으며 투정이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비싼 선물을 요구하지도 않는 내가 그에겐 다루기 좋은 동거인 일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화나면 화내지 못하고 싸움을 두려워했을까? 그러면 관계가 끊어지고 더욱 나쁜 상태가 될까 두려웠고 외로워질까 봐 겁났고, 그러니 싸우기엔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아 그렇게 반대한 결혼을 한 건데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올바르게 살려 노력한 내가 원하지 않는 사각의 링에 올려진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매일이 두려움이었고, 조바심으로 집안을 오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 내게 지영은 이렇게 충고했다.


“너의 속도가 너무 빨라. 좀 기다리는 연습을 좀 해봐. 넌 성실하고 열심히 해야 주변이 편안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산 거야. 네가 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 버티고 싸워도 보고. 도망가지 말고. 희원이 일도 넌 일 터지지 마자 변호사 만나서 아이들을 위한 방법을 찾아주려고 했잖아. 그냥 두면 둘 다 성인이니 어떻게든 마무리할 거고 애들도 자신들을 지킬 힘을 키울 기회를 갖겠지. 조바심 내지 말고 조금만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기다려봐. 넌 이미 좋은 엄마야. 그걸 의심하지 마!”      


난 정말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존재감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국민학교 시절의 나처럼 존재 감 없이 사라져 버리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으로 X에게 잔소리, 싫은 소리 조차 하지 않고, 나의 존재감만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게 집사, 비서인 줄도 모르고.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준비면서 양가가 다 반대하면 둘이 물 한잔 떠놓고 우리끼리 결혼하면 된다는 X의 믿음직한 말에 현혹되었던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나의 온 인생을 걸었다.


 그렇게 진행된 결혼에 X의 본가에 가서도 시부모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결혼 후 바로 임신을 해서 큰 아이를 낳았을 때도 병원에 와서 큰 아들이 태변을 내 안에 누고 나와서 39도, 40도를 오가며 정신이 없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 손자 어딘노?’ 라며 신생아실로 가버렸다. 그것도 괜찮다. 처음 명절을 맞아서 3개월 된 큰아이를 데리고 시부모에게 갔는데, 손주를 안아보지도 않

는 시부모에 대해  놀랐다.보통 아무리 며느리가 싫어도 첫 손자를 보면 좋아하고 앉아줄 법도 한데 쳐다만 볼 뿐 자신의 아들에게 돈이야기부터 꺼냈다.

X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돈 때문에 싸우기 시작하더니 시아버지가 밥상을 엎어버리고 시어머니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때 난 너무 무서워서 바닥에 뉘어놓았던 희원이만 끌어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X는 ‘짐 싸라. 나가자!’라는 말에 정신없이 짐을 싸서 뒤를 쫓아나갔다. 그랬더니 시아버지가 뒤에 쫓아오면서 아파트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비, 애미 리고 가는 저 아들놈 새끼 좀 보소. 메누리라는 년이 말리지도 않고... 저 나쁜 년놈들 좀 보이소~”

      

그날도 난 X에게 ‘네 부모는 왜 그러냐? 나한테 욕하고, 손주 옆으로 밥상 던지고....’라고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면 이미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X로부터 미움받을까 봐 두려운 겁쟁이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