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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Mar 15. 2024

진짜 신혼여행


나는 이상주의자인 것 같다.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했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시간이 지나는 중에도 아이의 재롱과 따뜻한 부모님의 도움은 큰 도움이 되었다. 제일 가까운 친구인 지영이나 민경이가 모두 외국에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열악한 시골 살림에도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희원이가 13개월쯤 되었을 때, 여름휴가철에 친정 부모님이 부르셔서 찾아뵈었다.


이번 연휴에 별 계획 없으면 언니가 있는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시면서 비행기표는 사 줄 테니 셋이서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신혼여행도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게 엄마는 늘 마음에 걸렸어. 이게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와라.”     


우린 너무 좋았다. 나는 대학원 시절에 이미 다녀왔지만, 처음으로 국외로 나가는 X는 많이 설레어했다.


방콕 공항에 도착하니 언니와 형부가 마중 나와서 언니네 집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한남동 같은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는 깨끗하고 멋진 건물, 풀장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언니는 희원이를 처음 만났고, 는 수빈이와 효빈이 만나서 너무 기뻤다. 게다가 수빈이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내가 너무 이뻐했고 한국에 나올 때면 나와 함께 잠을 잘 만큼 나를 잘 따랐는데 그새 조금 더 커서 이제 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효빈이는 희원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둘은 서로 처음 보는 사촌들이어서 그런지 서로 서먹해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싸우면서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마저 귀여웠고 행복했다.


언니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파타야 여행을 가서 넓고 깨끗한 호텔에서 마사지도 받고 해변에서 놀면서 해양스포츠즐겼다. 모래를 처음 발에 묻히게 된 희원이는 처음에는 짜증을 내고 울더니 금세 익숙해져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텐트에도 가서 외국인들이 먹는 간식도 얻어먹어가면서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도 하고 즐겁게 잘 놀았다.


시골을 떠나 이런 외국에서 3 식구가 함께 올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고, 언니네 덕에 편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계셨다. 희원이는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하부지, 나 바다에 가써요. 물이 엄~청 많고 넓어요. 근데 효빈이 누나는 미워요. 나한테 장난감 안 줬어요.....”


집으로 오는 내내 희원이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다가 잠이 들었고, 집에 와서 자리에 눕히고 났더니, 친정아버지께서 우리를 안방으로 부르셨다.


아버지는 등기 을 내미셨다.

“ 며칠 전에 이서방 이름으로 이런 게 왔는데, 어떻게 된 건가?”


그건 친정집에 차압을 했다는 차압용지였다.

편지를 뜯어보니 시어머니가 X 몰래 카드를 만들어서 2000만 원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아서 연대 채무자로 아들인 X의 재산에 차압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에게는 집이 2채가 있어서 세금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얻어 살고 있는 친정집의 이름을 X의 이름으로 해두었더니 시어머니는 그에게 담보가 있음을 알고 몰래 카드를 만들고 상환하지 않은 것이다.      


편지만 두고 아버지는 나가셨다. 우린 정말 너무 어이가 없었고, X는 당장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며 싸웠다. 다음날 시댁으로 급히 내려가 문제를 해결하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워낙 큰 액수이고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매번 은행에 아들의 인감증명서를 가지고 가서 대출과 카드를 만들어서 쓰고 다니는 시어머니도 이해가 가질 않았고, 왜 우리가 그걸 갚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도 화가 났다.


다음날 X는 본가로 갔다. 그 사이 시어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니가 갤혼하믄서 헤온게 뭐가 있노? 그깟 몇 푼 된다고 느그 집에서 갚아주면 되지? 뭘 그렇게 난리를 치노?”


오랫동안 참아온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난 처음으로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제가 뭘 그렇게 못해 갔나요? 그동안 결혼해서 갚은 빚이나 이자가 얼만데... 그것 만으로도 부족해서 이젠 친정집까지 노리시는 거예요? 정말 이건 너무 하시는 거 아닌가요?”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시어머니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저녁에 돌아온 X는 문제를 해결하고 왔다고 했고 며칠 후 차압은 풀렸고 놀라신 부모님은 집의 명의를 다시 아버지 이름으로 돌려놓으셨다. 두 분 다 이런 상황이 이해도 되지 않으셨을 거고 많이 놀라셨을텐데 X에게는 '그저 다행이다'라고 만 하셨다.


제대를 6개월 정도 남긴 상태였는데, 이정도 시간이 흐르고 아이도 태어났으면 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시부모는 변화가 없었다. 그즈음에 X는 제대 후의 진로를 고민했던 때였다.


X는 모대학의 교수 제의를 받아서 너무 좋아했지만, 월급을 많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개업과 교수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좀 어려워도 지금처럼 힘들진 않겠지. 나도 이제 강의 나가기로 했으니까 좀 도움이 될 거야!”


그 당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희원이를 역 앞에 어린이집에 맡기고 강원도 시골에서 첫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와서 다시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가서 대전에 있는 모 대학에서 오전 강의를 하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서 오후와 저녁 강의를 하고 다시 역까지 가서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까지 기차를 타고 왔다. 그렇게 다니면 14시간 정도의 힘겨운 일이었지만 작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여러 회사의 블랙컨슈머를 하면서 매달 2~30만 원 정도를 받아서 생활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 X가 월급 때문에 고민하는 것에 조금은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결국 차압 사건의 영향이 컸다. X는 개업을 하기로 정했다. 어디에 개업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니 서울은 월세며 유지비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수도권 외곽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IMF가 시작되었고 경제는 엉망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본 결과 친정부모님이 사시는 곳 근처로 가기로 했고, 부모님들께서 이러저러한 도움을 주셨다. 개업을 위해 모아놓은 돈을 다 썼기 때문에 우리는 친정 부모님의 집을 들어가 살기로 했다. 그렇게 친정살이가 시작되었다.


개업을 준비하면서 인테리어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내가 아는 사람이 인테리어를 해서 다른 곳에서 쓰다가 뜯어온 타일과 소파 등을 얻었고 디자이너를 따로 두지 고 우리 둘이서 고민해서 도면을 만들어서 목공과 페인트, 전기 공사를 했다. 최소한으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몸이 좀 힘들어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렇지만 IMF로 긴장된 경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업을 하다 보니 위치나 내부 분위기는 무척 부족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환자가 쉽게 늘지 않았다. 환자가 없는 날도 있었고 3명 왔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나도 강의를 안성과 대전으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활비에 보탤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친정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지도 못했다.


그런 시간 중에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언어적 학대와 돈 요구는 지속되었고, 친정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화하면서 부모님이 받아도 욕을 해서 언짢게 만들어 버렸다. 정말 너무 죄송하고 할 말이 없었다. 사돈지간이면 참 어려운 관계인데, 이렇게 몰상식한 태도에 두 분 다 X에게 단 한 번도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너희만 잘 살면 된다’라고 위로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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