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터질 일이 터졌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시부모가 어젯밤에 이사를 했다고 한다. 야반도주인 것이다.
그 며칠 전에 시어머니가 또 전화를 해서 돈요구를 해서 없다고 하니 예단으로 준 밍크코트-나는 개인적으로 무서워서 지금도 밍크코트를 안 입는다-를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거라도 내놓으라는 요구에 미련 없이 보내주었다. 나는 한 번도 입은 적도 없지만, 역시 사이즈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등에 짐을 지고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마저 보내고 나니 받았던 모든 예단을 정리한 것이라서 맘이 편했다.
그렇게 일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시댁 큰집에서 연락이 왔단다. 자신들에게는 이야기도 없이 트럭이 와서 짐을 쏟아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 주에 결국 우리 가족 모두 그 짐을 정리하고 치우러 큰 댁으로 내려가서 하루 종일 치우고, 버리고, 챙길 것-사진, 앨범뿐-들을 챙겨서 돌아왔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지쳐서 그날은 우리 가족 모두 바로 뻗어 버렸다.
다음 날 내가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어디로 가신 거야? ”
“나도 잘 몰라. 둘이 각각 다른 곳으로 간 거 같은데... 수원이랑 의왕으로”
나는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고 나쁜 일이 있어도 부부가 그렇게 다른 곳에 머무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주민등록초본을 챙길 일이 있어서 보니 시부모는 그즈음에 이혼을 했던 것이다. X는 이런 상황을 내게 설명하기도 부끄러워서 말을 안 했던 것 같아서 야반도주의 이유와 시부모의 이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고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고 몇 년 동안은 시부모를 볼일이 없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고 X가 명절에 시댁에 가자는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찾아간 시댁은 수원 외곽 빌라촌의 3층이었다. 들어가서 보니 시어머니는 없고 시아버지만 계셨다. 절을 하고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치와 야구 이야기, 친적들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는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데, 싱크대 주변이 너무 더럽고 숟가락통이나 주변 용품들에 검은곰팡이가 가득해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원치 않게 주방에 보이는 곳만이라도 좀 닦고 정리를 했는데, 제대로 살림을 하지 않은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와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 말처럼 안물안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정이나 손주에 대한 사랑 같은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의례적 행사를 한번 치르고 온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명절이 되어서 X가 또 시댁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번엔 또 다른 곳이었는데, 작고 좁은 골목들을 헤매고 들어가서 주변에 겨우 주차를 하고 빌딩 건물 구석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니 2층에 살림집이 있었다. 방 2개에 작은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이번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물론 주변을 돌아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방에는 작은 소소한 짐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화장실에는 악취와 함께 물때가 바닥에 가득했고 두 사람이 각방을 쓰며 소통은 없는 듯 각자의 방에 TV 하나씩 두고 따로 쓰고 있었다.
찌든 냄새와 더러운 벽지,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장판, 냉장고 가득 어질러져있는 검은 봉지 등 내가 뭘 어찌할 수 없는 집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어서 최소한의 일만 했다. 밥상을 차리고, 물을 꺼내오고,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했다. 나에겐 아무 말도 걸지 않는 두 사람에게 나는 투명인간 취급당했고, 손주들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만 떨며 결국은 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X도 부모와 별달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지 아이들과 TV만 보다가 나왔다. 나오면서 X는 용돈 봉투를 드리고 나왔다.
차에 타서 친정으로 가자고 했다. 친정 부모님은 희원이와 민우를 끌어안으며 ‘아이고... 내 새끼들 많이 컸네! 어서 와~ 어서 들어와~’ 라며 반가워하시고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정갈한 음식들을 차려주셔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왔다. 나오는데 아버지가 두 아들들에게 이름까지 적어서 봉투에 넣어서 용돈을 주셨다.
시댁과 친정을 가는 X의 태도와 온도는 이렇게 달랐다. 자신의 부모에겐 선물과 용돈을 준비했지만 친정 부모님께는 아무 선물도 사지 않고 오히려 아들들이 용돈을 받아왔다.
그렇게 몇 해가 가고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정에 갈 때도 선물을 사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부모는 명절이면 전화를 해서 고기를 사 오라는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등심 2kg, 안심 2kg, 양지살 2kg 등-의 고기를 50여만 원이 넘게 사 오라는 것이다. 가는 차에서 블루투스로 연결한 전화에서는 ‘나가 괴기가 먹고 싶어 가 그래 그란다...마이 사와라!’ 그 가격과 양을 짐작도 못하던 X는 계산을 하고 양과 가격에 놀라서 다시 전화를 해서 ‘뭘 이렇게 많이 사오라 카니교? 이 많은 걸 둘이 어뜨케 다 먹을라꼬?’ 대답은 ‘내 다 묵을 수 있다. 그냥 사오레이!’ 시댁에 가서는 난 다시 투명인간이 된다.
친정에 가면서 X는 아파트 초입 과일가게에서 배를 한 상자 샀다. 어이가 없었지만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다.
두 집의 다른 모습에 아이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그렇게 지내던 몇 년 후 갑자기 명절에 제사를 지내러 사촌형의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물을 사서 도착한 서울 외곽의 집에는 사촌형들과 그 자녀들 즉, 나에게는 시조카들이 와 있었다. 그래도 올케들과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시아버지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갔다. 벽 양쪽으로 X의 사촌형과 아이들이 서있는데, 거실 끝에 소파에 혼자 있던 시아버지가 보였다.
“니 거기 좀 안자봐라. 나가 TV하나 살달라꼬 웰매나 이야기했노? 와 안주는데? 언제 사줄끼가? 말해봐라! ”
화가 난 시아버지와 양옆에 서있는 친척들 중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냉정한 눈빛으로 서서 나를 아래로 보고 있던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나, 부엌에서 이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올케들과 민우.
나는 너무도 창피하고 무섭게 인민재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라 말을 못 하고 눈물이 나려 할 때, X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나의 인민재판 장면을 보았다.
“이게 뭐 하는 검니꺼? 그놈의 TV 내가 사준다 않했슴니까!”
“원제 사줄킨데?... 나가 메누리한테 확답을 받을라 하는기다.”
부엌으로 돌아온 내게 민우는 화난 목소리로 “난 친할아버지 증말 싫어. 왜 자꾸 엄말 괴롭혀?” 올케들도 “마~ 새댁이가 참아라...작은 아버지가 와 그러시는지 모리겠다...”
이렇게 명절마다 나는 욕받이였다.
어느 해 명절에는 밥을 먹다가 내 머리를 보고 “메뉘리 니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뭐꼬?” 라며 트집을 잡았다. 나는 4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많아서 검은 머리보다는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해서 연갈색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게 화근이 돼서 또 말싸움이 났다, 웬 일로 X가 나서서
“ 메누리가 지금 나이가 몇이고, 대학교수를 몇 년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교?”
“ 메누리 니가 무신 대학 교수가?”
그랬다. 그들에겐 나는 투명인간이었기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아서 대답도 안 해서 나에 대해 아는 건 얼굴뿐이었다.
또 한 번은 희원이가 삼수만에 대학에 합격하고 갔던 명절이었는데.
시아버지가 ‘어느 대학에 갔니?’라는 질문에
희원이가 “**대학에 들어갔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대학이 무슨 대학이 뭐 하는 대학이꼬. 창피하게 시리?” 그러면서 “ 메누리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켜가 손주가 할애비한테 전화 한 통을 안 한다. 못돼게 시리!” 불똥이 나에게 떨어졌다.
희원이와 나는 너무 상처를 받았고 X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싸움으로 끝난 명절이었고, 돌아오는 차에서 우리 넷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해 설날과 추석에 난 욕받이였고 그걸 감내하면서 참아야 했고, X는 말리는 척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지키지 않고 자기 부모를 보호할 때 이미 알아봤어야 했다. 그 쓰레기도 같은 종족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