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사 Mar 20. 2024

 시어머니의 방조


코로나가 한창이던 2019년 가을에 갑자기  X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가 입원을 했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다.

**병원에 가보니 시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X는 주치의를 만나 이야기하고 시어머니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왜 갑자기 저렇게 되신 거래?”

“3일 전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가 감기약 사다 먹이고, 한의원 가서 침 맞고 그렇게 내버려 뒀대. 근데 오늘 의식이 없어서 119타고 입원했는데 뇌출혈이었던 거야.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왔으면 저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저기압인 X를 위로하며 집으로 와서 아이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이제 우린 명절마다 요양병원으로 갔고  시어머니는 간병은커녕 멀리서 남편을 바라보기만 했다.

X는 1년이 넘게 요양병원과 중환자실을 오가는 시아버지 때문에 병원비와 간병인비 등 때문에 힘들다며 시누이에게 전화를 해서 너도 일부를 보태라고 했더니 시누이가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냐 했다고 해서 한참을 싸웠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가던 3월 초에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그 사이 몇 번 위독한 상황을 지나면서 버티던 시아버지가 다시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X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우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방 자기 집에서 누워있던 토리가 허공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던 토리의 갑작스러운 반응으로 우리 셋은 토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때 X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아버지 돌아가셨어. 애들 데리고 병원으로 와라~”     


우리 셋은 똑같이 방금 토리가 허공을 향해 짖기 시작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똑같이 생각했고 소름이 돋았다.  


그날은 X와의 결혼기념일 새벽이었다. 시아버지는 끝까지 내가 미웠나 보다. 결혼기념일이 시아버지 제사날인거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두 아들과 함께 마스크와 며칠간 필요한 짐들을 챙겨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이미 영정이 준비되어 있었고, X와 시어머니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나와 아들들도 상복을 차려입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집단 모임 자체가 금지된 상태에서 조문객을 받는 것은 무리였다. 연락만 하고 못 오는 사람들은  X의 계좌에 부의금만 보내기로 했다. 당시 대구가 가장 심한 지역이라서 대구에 사는 시누이는 코로나 검사를 하고 가족들과 왔다.     


그 몇 달 전에 발목 인대수술을 한 나는 걷는 것이 원활하지 않고 통증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장례준비를 했다. 내가 그러고 다닐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네 식구들은 따뜻한 방 안에서 하하 호호 신이 났다. 참 콩가루 집안이다.


경상도에 사는 친척들은 못 들어온다는 병원의 통고에 서울주변 지역에 있는 친척과 지인들에게만 연락을 했다. 나는 학교에 담당직원에게만 연락하고 코로나를 핑계로 학교 게시판에는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X의 시부모들은 내가 어느 대학의 교수라는 것도 모르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나?


하지만 X와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친정 부모님께는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하고 오시지 말고 전화만 하라고 말씀드렸지만 기어코 오셨다. 제일 먼저 조문객이 친정 부모님이었고 바로 언니네 부부가 왔다.

X는 친정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 누꼬?”

옆에 있는 시누이가 “사돈 아이가? 새언니 부모님들.”     


결혼식 이후 25년 안 만난 적도 없으니 기억 못 할 만도 했다. 그렇게 친정 식구들이 가고 장례식장은 한가했다. 주변의 장례식장도 거의 조문객이 없었다. 내가 방명록을 쓰는 안내데스크에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안에 있던 시어머니의 전화 통화 목소리가 들렸다.     

“마~ 이제 끝났다. 아이고  마~이제 살 것 같이 후련하데이.. 후후후, ”

시어머니의 웃는 소리가 방을 넘어 내게 들렸고 연이어 시누이가

“엄마... 좀 작게 말하레이. 오빠야가 듣겠다!”     

나는 조용히 조문실을 나왔다.


어쩜 남편이자 아버지가 죽었는데, 저렇게 시시덕거리면서 좋아할 수 있을까? 물론 시아버지가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참 기분이 안 좋았다.      


장례 둘째 날부터 X의 친구와 지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둘째 날은 꽤 많은 사람이 조문을 왔고 입관 전에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시어머니와  X와 우리 가족, 시누이만 들어갔는데, 장례지도사가 마지막 가시는 분께 인사를 하라며 손으로 한 번씩 쓰다듬으라고 했다.

거기서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우리는 기독교인이라 그런 거 안 합니다!”며 돌아섰고  X는 “울 아부지 이쁜 옷 입으셨네. 잘 가이!” 라며 혼자만 울었다.     


3일째 저녁에 시누이는 자신에게 들어온 부의금을 달라고 했다. 나와 희원이가 정리를 하고 있으니 나오면 주겠다고 했지만, 겨우 2개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부의금을 나눠달라는 시누이와 시어머니에게 X는 각각 200만 원씩 줬다고 한다.  


마지막 의식인 화장터와 선산으로 가는 길이 멀기도 하고 코로나 때문에 가려는 버스 섭외도 쉽지 않았고 지역을 통과하면서 절차가 복잡하다고 해서 X와 희원이만 가기로 하고 시어머니, 나, 민우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늦게 돌아온 X는 바로 침대에 누워서 울고 있었다.

내가 다독이면서 “고생했어.”라며 위로하니

“아부지는 엄마가 죽인 거야. 엄마가 그렇게 방치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아부지가 의식있을 때 자기 통장에 700만원 있으니 그걸로 장례를 치루라고 했는데 그걸 엄마랑 윤경(시누이)이가 찾아서 나눠 가졌더라구.... 

그런 X에게 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언행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심지어 좋아하기까지 하던데 ' 라고 생각하며 너무도 뻔뻔하고 잔인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 대해 치가 떨렸다.


이어서  “사촌 형이 와서 그러는 거야. 너그 아부지는 살아생전에 나한테 잘해 준게 한 게도  없. 다른 친척들도 와서는 아버지 욕만 하고 가는데,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 걱정 마.. 당신은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라며 우는 X를 달랬다.

 

난 그때 결심했다.

잘 죽어야겠다.

그리고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구나.

살아생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장례식장에서 판가름이 나겠구나!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며 고인을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전 19화 인민재판 받는 욕받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