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어린 날의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하자면, 어딘가 망가진 사람도 꽤나 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걱정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히 걷다 보면 모든 게 차례로 순조로이 네게 올 거라고. 욕심은 멀리, 포용은 가까이. 좁아터진 마음을 갖고 살면 좋은 기회도, 사람도 들일 수가 없다. 그러니 가시를 거두고 타인을 들이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줄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증거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적게 울고 많이 웃는 사람이 되었다. 날 사랑하는 이들에 파묻혀 종종 들뜨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삶은 절정의 평온을 영위할 때 비로소 완벽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기쁨도 슬픔도, 행도 불행도 딱히 없는 감각의 무와 유의 경계에 서 있는 순간 말이다. 생에 평온이 깃든다는 건 일상에 높낮이가 없단 뜻만이 아니다.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안온한 밤과, 적당한 온도의 관계와 관심을 이룰 때 마침내 평온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를 이루기란 기적과도 같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생에 한 지점에서 이러한 절정의 평온을 느끼길 바란다. 그러면 먼 훗날 행복한 삶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어른이 된 데엔 타고난 낙천적인 성정이 한몫했다. 나는 지하철비를 아끼려고 학교에서 집까지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바닷가를 지나는 게 행운이라 여기는 아이였다. 모래사장에 들러 물멍을 하다 모래로 장난을 치다 또 대차게 일어나 걸음을 내딛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연약하지만 나약하진 않았고, 잠깐 보면 여리지만 오래 보면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든, 나는 꽃이고, 고로 꽃같이 어여쁘게 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을 종국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내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 과정으로 인해 분명 성장했고 결핍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순간의 선택들로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적당한 아픔과 적당한 극복이 적당한 비율로 어우러진 지금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다. 마구잡이로 돋쳐 있던 가시들을 무디게 만들며 스스로 다치는 날도 있었으나 그 과정 자체로 멋진 도전이었다.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혼자의 힘으로 안되면 손을 내밀면 된다.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줄 것이다. 설령 극복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자체를 수용하면 세상은 어떻게든 또 살아가진다. 앞으로도 내가 나를 최선으로, 나를 위해 타인을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길 바라며 이야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