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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y 10. 2024

아버지 죽이기

8화

이 한 문장을 무던한 마음으로 적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사실이다. 그 모든 과정 속 어린 내가 가끔 가엾고 대체로 대견하다. 넬의 노래 “마음을 잃다”의 가사 중에 “언제까지 내 안에서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건가요. 언제 죽어줄 생각인가요.”라는 구절이 있다. 어린 마음에 처음 이 노래를 듣고 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죽음”이라는 강렬한 단어를 발라드에서 처음 만난 것이기도 했고 “잊는다”란 표현으로는 모자랄 만큼 잊기 어려운 감정이 무얼까 곱씹기도 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누군가를 마음에 온전히 품고, 꾸역꾸역 떠나보내고, 또 괴롭도록 그리워해본 후에야 이 가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서 그의 잔상이 보일 때면 자신에게 치를 떨었다. 가령, 취미로 당구를 치러 다닐 때, 스릴 넘치는 아웃도어 스포츠를 할 때, 여행을 즐길 때, 은연 중에 그의 몸짓이 나올 때 스스로가 두려웠다. 취미와 외형이 닮았다는 건 폭력적인 유전자까지 내 안 깊숙이 자리해있지 않을까?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나도 그처럼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될까? 그는 어떤 것에 웃고 어떤 것에 분노했더라? 내 기억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그것들을 최대한 지양하며 살았을 텐데, 안타까웠다. 나도 아직 만나지 못한 내 일부분이 무서웠다. 어떨 땐 그와 경쟁하기도 했다. 무얼 하든 그보다는 내가 한 뼘 더 나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그러다 하루는 숨통을 조일 만큼의 허무함이 들이쳤다. 날 떠난 그를 이토록 곱씹으며 살고 있는 어리석은 내가 한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 안의 아버지를 죽여야겠다. 아버지를 죽여야만이 내가 나로서 빛날 수 있겠구나.


유흥을 좋아하는 사람은 수백만이다. 여행을 즐기거나 잔재주가 많은 사람 또한 수백만이다.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로부터 파생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와는 달리 동물을 아끼고, 자연에 감사할 줄 알고,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만일 그와 인생의 어느 접점에서 타인으로 만났다면 결이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을 거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이런 인식들로 그와 나를 분리시켰다. 피와 비명이 낭자하지 않는 나만의 방식으로 서서히 그를 죽였다. 그는 손끝과 혀끝으로 어머니와 나의 영혼을 죽이려 했지만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걱정도 두려움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쉽게 생각하자. 망가지지 않기로 선택하면 그만인 거다. 그의 잔향과 잔상을 모조리 짓누르고 그 자리에 내 일부분을 심는다. 이 씨앗은 과거를 거름 삼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늘을 선사할 수 있는 멋진 나무가 된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살아진다. 내가 지금 기댈 덴 이 믿음 한 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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