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함 하나 주실래요?

오늘은 쉬는 날

by 풀 그리고 숲

주문하시겠어요?

나태함 하나만 주세요.


평일 기준, 하루 정도는 나태하게 보내려고 한다. 어느 요일을 그리 보낼지는 결정하지 않았는데... 오늘 내 마음이 이런 걸로 봐서는 매주 화요일마다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주말은 육아로 꽉 채워지기에 평일보다 더 힘드니까, 주말 가까운 날에. 그렇다고 주말 지나 바로 월요일에 쉬자니 한 주의 시작이라 외주 제작사에서 연락이 올 확률이 높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시나리오와 동화를 쓰기로 했고,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브런치북 글을 쓸 예정이니 화요일 하루쯤은 딴청을 피워도 되겠구나 싶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등원하는 9시 반, 하원하는 오후 3시 반이 내 하루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필요가 있나. 지금은 오후 1시를 넘긴 시간. 두 시간 반 뒤면 아이가 돌아온다. 집안은 나쁘지 않은 듯 어지러운 상태. 창밖은 빗물에 얼룩져있다. 봄비가 만들어낸 물안개인지 뿌연 시야. 이런 날씨가 쌀쌀한지 이불속에 숨은 고양이. 적당히 녹은 아메리카노 속 얼음들. 아이가 남기고 간 아침밥의 흔적. 쌓인 설거지 거리. 질서 없이 아무렇게나 켜진 조명들. 어제 외출 후 정리하지 않은 가방. 소파 위에 젓가락과 파이. 그리고 귀를 간질이는 피터팬 OST 연주곡. 유튜브 영상 속 배경이 빅벤인데, 새삼 그리운 런던.


그런데 갑자기 선반 위의 탁상 거울이 흔들리네. 혹시 나는 못 느낄 정도의 미세한 진동이 있었던 건가? 겁나듯 심장이 살짝 콩콩 빨라졌지만 궁금증이 더 크다. 지진을 검색했는데 특별한 뉴스도 없고. 오늘 아침에 북한에서 약한 지진이 있었다는데 그 영향은 아닐 거 같고.


나른하다. 그냥 이대로 빈둥거릴까, 한숨 잘까, 책을 읽을까, 청소를 할까, 고기를 구워 먹을까. 그냥 이렇게 아무렇게나 끄적이고 있는 지금이 좋다. 주제도 없고, 보여줄 이 없고, 궁금한 이 없는 글을 쓰는 것. 이것은 일기인가 낙서인가. 얼굴에 뾰루지가 나려나? 만져보니 콕콕 쑤시는 느낌. 그나저나 뭘 하며 보내야 가장 뜻깊을까. 나른해서 한숨 자면 좋겠는데 눈 뜨면 지나가 있을 시간들이 아까워... 별거 아닌 이 감정들도 아까워서 노트북을 펼쳤는걸...


평생 글 쓰며 살고 싶다. 누가 요청한 기획안이나 대본 같은 거 말고. 내가 나에게 요청한 시나리오, 시를 남기며. 이미 그렇게 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더 딱 맞아지려니. 기획안 쓰고, 구성 잡고, 대본 쓰고, 촬영장 가는 게 참 좋았는데. 할 만큼 했나 보다. 그럼 지금 내가 평생 하고 싶다 말하는 이것들도 어느 때가 되면 시큰둥해지려나. 도망치고 싶어 지려나. 그려본 적 없는 상상이다. 그건 싫은데!


근데 말야. 그때도 아마 나는 뭔가를 만들고 싶어하겠지.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서... 시나리오 쓰는 것, 시 쓰는 게 싫어질 내가 또 기다려지네. 웃긴다 정말.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에 빠지면 "웃겨, 정말~" 한다던데. "나 웃겨,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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