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07. 04
예전에는 해가 지날수록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 믿었어요.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은 나, 유일하진 않아도 주인공 중의 하나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 왜, 있잖아요. 울면 비극의 주인공, 웃으면 화사한 청춘물, 총알도 알아서 피해 가는 그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는 알았나 봐요. 저는 어른이 되어가기보단 늙어가고 있어요. 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나요. 그걸 알고서부터는 차마 스스로를 어른이라 말할 수는 없었어요. 판단하기보단 이해하고,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들이 제겐 아직 어려운걸요. 꿈꿨던 동화도 이제는 죽은 것 같아요. 네버랜드의 문은 닫혔고 팅커벨은 더이상 보이지 않죠. 주인공을 피해 간 총알에 맞고 쓰러지는 게 바로 나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죠.
웃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드네요.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납득하지 못하겠다 해도 상관없어요. 저도 그냥 살아가는 거니깐. 자기 합리화라 불러도 불평하지는 않을게요. 서툰 내 인생을 위한 변론에 건배를! 저는 어른도 아니고, 주인공은 택도 없어요. 하지만 오늘도 삼시세끼 밥을 먹고 있죠. 살아가는 거 자체가 근성이라고요. 저금한 건 없어도 지조는 있고, 주인공은 아니어도 자존심이 있으면 어디 가서 꿇리지는 않아요. 휘청거리다 무릎 꿇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하게 일어서는 게 바로 저의 자존심이에요. 게다가 저는 중대한 비밀을 알게 됐지요. 인간은 생각할 때만 어른이 되어간다는 걸. 요구할 때보단 줄 때, 존중받기보단 존중할 때 어른을 닮아간다는 걸. 뭐든지 시작이 반. 벌써 절반은 어른이 된 거라 말하고 싶지만 역시 그럴 리는 없겠죠.
맞아요, 저는 나이를 먹고 있어요.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좋은 말로 할 때 줄 때 먹어라’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가정교육 착실한 유교 보이. 가르침을 따라 나이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려고요. 죽고 나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대신 소화제로 유산균을 먹어둘까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 침묵으로 말하는 현명함, 실패를 가능성으로 보는 혜안이 있다면 세월은 썩지 않아요. 켜켜이 쌓인 시간은 우리의 안에서 발효되겠죠. 언젠가는 되고 싶어요. 입에 넣으면 진한 존재의 향을 뿜으며 녹아내리는 녹진한, 치즈 같은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