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가기 전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던 친구와 만나 점심과 저녁 모두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은 날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대사관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취합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렇게 늦은 시간에 카카오톡으로 전화 통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로만 알고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친구는 그냥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가다 내 생각이 났다면서 시간이 된다면 잠깐 만나자고 했다.
화장도 다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을 끝내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 근처에 있는 시계탑 앞에서 오도카니 서있는 친구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뛰어가니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진짜 대단하다고, 정말로 미국에 가는 거냐고, 서운하다고, 그리고 부럽다는 말을 쏜살같이 했다. 그 말들에 간간이 대답을 하던 도중 나는 잠깐 짬을 내서 친구에게 짧게 자른 머리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걸어가던 중 보게 된 그녀의 구두가 너무 귀여워서 구두가 정말 예쁘다고도 말했다. 친구는 오늘 일본 여고생 콘셉트에 맞춰 옷을 입어 보았다고 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우리가 술을 마시러 간 곳은 손님이 단 한 테이블에만 있던 깨끗하고 한산한 양꼬치 가게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문한 양꼬치를 먹기보다 서로가 생각하는 상대방의 대단한 점을 꺼내놓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그나마 소주와 맥주는 이야기의 중간중간 한 모금의 안주와 문장 사이의 쉼표 역할을 하며 들인 돈만큼의 값어치를 했다.
친구가 내게 끝도 없이 이야기했던 말의 요점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기로 마음먹은 내 용기와 이를 지지하는 가족, 그리고 여건이 바로 그녀가 한때 꿈꿨던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원하는 걸 생각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는 친구는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친구의 모습 중 가장 진지해 보였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친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가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좋아. 금방 포기하고 돌아와도 괜찮아. 그냥 네 주변에는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 네가 잘 되길 바랄 거야. 나도 정말 내 친구들이 다 잘 되길 바라거든. 그곳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난 네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금방 포기하게 되어도 정말 네가 자랑스러울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칭찬을 이렇게 한꺼번에 한 아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참 멋쩍기만 했다. 그래서 분명 제대로 올려놓은 것 같은데 톱니바퀴의 움직임에 맞춰 저절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는 양꼬치에 시선을 두고 괜히 그 꼬치를 이리저리 밀어보았다. 그리고 친구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정말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평소 친구를 보며 속에 품어왔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네가 가장 빠른 시기에 진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직장을 구해서 네가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나도 전에 직장을 구한 적이 있었잖아. 나는 내가 다니는 직장과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했어. 아무도 내가 일하는 곳을 모르니까. 그렇지만 넌 너의 자리를 말할 때 아무 설명 없이 그냥 공무원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널 인정하고. 자신을 표현할 때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 없어서 나는 네가 부러웠고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어."
친구는 우쭐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무원은 나이나 학력 제한 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은 원하는 것의 목록 중 가장 마지막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5,6년이라면 모를까 1년, 2년 남보다 먼저 들어와서 경력을 쌓은 건 비교할 거리도 안 되는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했다. 친구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공무원으로서 자리를 잡았는지를 고려하면 남들보다 확연히 빠른 시기에 입사한 것은 분명히 칭찬할 거리였지만 그때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언급했다. 그래서 그 경쟁을 뚫은 네가 대단하다고 말했더니 친구는 정말 의연함이 묻어나는 말 한마디를 남겼다. "이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
늦은 밤에 전화를, 그것도 카카오톡 앱으로 전화를 건 것도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친구가 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항상 애교가 몸에 배어있어 마냥 귀엽게만 보였던 친구가 눈앞의 과제를 대할 땐 이렇게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예상 밖이었다. 나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으려고 혼잣말하듯 한 번 더 되뇌었다. 이것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녀는 확신을 주려는 듯 그렇게만 하면 너도 지금부터 공부해도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게 공부를 해도 소수점 차이로 낙방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을 거란 생각이 얼핏 들긴 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구와 대화하는 내내 나는 친구가 정말 성숙한 어른이 다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친구는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사실 너네 집 근처에 와본 적은 전에도 정말 많았는데 그때는 그냥 너도 바쁠 것 같고 네가 또 예전에도 계속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만 같아서 연락을 안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서운하고 아쉽고, 진작 연락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친구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참 마음씨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날의 나는 그녀의 그 말 한마디가 모두 어른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자꾸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몇 달을 내리 백수로 지냈으면서 친구들에게 연락도 자주 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친구를 역까지 바래다주는 와중에도 그 친구는 내가 최근 들었던 말 중 가장 따뜻한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세상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그리고 가서 실패해도 정말 괜찮다고. 도전하는 것 자체가 아주 대단한 거라고. 그러나 나는 미국 인턴을 준비하며 단 한 번도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잘나서 이런 기회를 얻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인들에게 곧 미국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바로 '대단하다', '부럽다'였다. 그때마다 사실은 자랑스럽게 내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맞받아칠 수 없어 속이 상했다. 게다가 나는 겁이 없고 자신감이 넘쳐서 미국행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든 해내겠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헤매어도 어떻게든 원하는 걸 얻었으면 된 거지, 하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낙관적인 마음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젊은 모험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여러 친구들이 건넨 나에 대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그날 친구가 해준 말들은 꼭꼭 씹어삼켜 맘속에 꼭 담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리울 때 이날 함께 나눈 대화를 두고 두고 되짚어보고, 친구가 내게 해줬던 말과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때가 오면 빠짐없이 이 이야기를 다시 건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