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직원에게서 아이폰을 샀다
사회 경험도 없고, 원어민만큼의 영어 실력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도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가질 수 있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미국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짐을 눌러 담아 혼자 끌기 버거워진 캐리어 두 개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유심을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내 핸드폰이 너무 예전에 출시된 기종이라 맞는 유심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로밍을 신청하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을 떠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일과 마주하게 되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공항까지 바래다 주신 부모님과 헤어지고 혼자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눈물 콧물을 닦아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눈물을 터뜨린 것 같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마주한 사건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를 실망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겪어보고 싶어 미국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를 지켜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의 삶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보단 고생을 자처한 멍청한 뜨내기의 삶에 더 가깝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새로 머물 집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중, 한 집주인이 미국 번호가 아닌 한국 번호로 전화를 한 것에 의문을 가졌다. 유심을 아직 구매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니 아는 사람이 핸드폰 가게를 한다며 한 가게를 추천해줬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핸드폰은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고, 어플도 한참의 시간을 들여 겨우 실행할 만큼 상당히 느려져있었다.
며칠 후 가게를 찾아갔다. 알고 보니 중고폰을 파는 가게였다. 살면서 중고로 물건을 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쓰고 있는 핸드폰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아 보였다. 추천한 물건 중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기계를 구입하고 추천하는 유심을 샀다. 중고였지만 아주 빠르고 액정이 커다란 핸드폰이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아졌고, 밖에 나온 김에 카페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서 휴일을 즐겁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이미 해가 져있었다. 하지만 금방 우버를 불러 집에 갈 생각이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버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꺼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핸드폰은 스스로 재부팅을 반복했다. 로고가 뜨고, 진동이 한 번 울렸고, 검은 액정이 나타났다. 잠시 후, 새하얀 바탕에 또 로고가 뜨고, 진동이 한 번 더 울리고, 그러다 또 꺼졌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던 핸드폰은 곧 폭발할 듯이 뜨거워졌다.
주변에는 젊은 청년들이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와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유유히 주차장의 수많은 차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나는 혼자였다. 넉넉히 한 달 치 로밍을 신청한 옛날 핸드폰은 아직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것으로 우버를 불러 집에 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끝도 없이 울었다.
'충청도 사람 핸드폰이라서 그런가 봐.'
주변 사람들은 어플 하나 실행하는 데 10초가 넘어가는 내 핸드폰을 보며 답답해했지만 핸드폰의 태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웃으면서 넘어가길 반복했다. 고장 난 중고 핸드폰을 환불했으니 달리 사용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곧 낡은 핸드폰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했고 그때 마침 새로운 아이폰의 출시로 회사가 떠들썩해졌다.
겨우 굶지 않고 살아갈 만큼의 주급만 받는 내게, 새로 나온 핸드폰을 구매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모험이었는데 사실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작은 모험 하나가 더 있었다. 태어나서 애플 제품은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새로운 핸드폰을 구매해야 한다면, 한국에서 구매하기보다 현지에서 구매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긴 했다. 그래서 큰 맘먹고 가까운 애플 스토어에 갔다. 전면이 통유리로 된 멋진 건물에는 애플 제품을 능숙하게 갖고 노는 사람들과 그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며 수다를 떠는 편한 티셔츠 차림의 직원들로 가득했다.
나는 마음에 두고 있던 기종을 몇 번 만져보고,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바로 결제를 요청했다. 활달하진 않지만 무뚝뚝하지도 않은 수염 난 직원은 아주 간단히 결제를 마치고 다른 직원에게 나를 데려갔다. 옛 핸드폰에 있는 데이터를 옮기는 걸 그녀가 도와줄 것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한눈에 봐도 나이가 아주 많아 보였지만, 내 결제를 맡았던 젊은 직원은 그녀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와 똑같은 티셔츠 차림을 한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갖고 있어서 정말 젊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놀랍게도, 그녀보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노부부가 휠체어에 앉아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너무 자연스럽게 눈 앞의 장면에 녹아들어 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오늘 수요일이네'라고 말할 때처럼, '오늘 추석이네'라는 말에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는 한국인 중년 여성이 미국에서는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다.
그녀는 나 말고도 살펴야 할 다른 손님이 많아 보였다. 내게 핸드폰을 연동하는 법을 알려주고, 진행률을 알리는 게이지가 핸드폰 화면에 뜨기 시작하자 잠시 다른 손님들을 보러 자리를 비웠다. 휠체어에 앉은 노부부를 포함한 다른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때때로 내게 말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동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게이지가 다 차면 이제 핸드폰 때문에 속이 상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며 지루한 시간을 버텨냈다. 건물 밖으로 보이는 노을 진 하늘이 예쁘다는 감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속 편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새 아이폰이 느닷없이 오류 메시지를 띄웠다. 데이터의 50%도 연동되지 않은 채였다.
때마침 내게 다가온 그녀를 불러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녀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다른 직원을 불러 세운 그녀는 내가 예전에 쓰던 기종은 애플이랑 연동이 안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 그의 대답은 '그럴리는 없다'였다. 나는 한국에서 사 온 기계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시했지만 그 직원은 그게 오류의 원인이 될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더니 난생처음 보는 기계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그걸 통해 데이터를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는데, 나는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데이터를 옮기는 간단한 절차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한 번만 더 시도해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이전과 같은 오류 메시지를 띄운 핸드폰을 또 보여주게 되었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이야기했다. "지금 나랑 장난해?"
이제 막 공장에서 나온 핸드폰이 무슨 죄가 있을까. 그것보다는 온몸이 시뻘게지도록 애쓰는 옛 핸드폰에 무리가 간 게 아닌가 싶었다. 걱정이 될 정도로 옛 핸드폰의 발열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굳이 날 말리진 않았는데, 아까부터 상대하고 있던 그녀의 손님들이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핸드폰이 제 역할을 끝마치길 기다렸다. 사람을 약 올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상승하던 데이터 연동률은 일정 분기를 넘어가니 아주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려하던 오류 메시지 대신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나와 그녀 모두 크게 안도했고,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네요.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
책 속의 현자가 내 삶에 실제로 들어온 것 같았다. 현자는 예상과는 달리 긴 수염도 없었고 길게 늘어지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백발이 무성했음에도 남들처럼 편한 옷을 입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당당하게 누비며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추가적으로 설치할 어플이 있으면 여기서 다 해결하고 가라고 말했다. 저녁이니 우버 잇츠를 다운로드하고 집으로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건 어떻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현자라는 말도 좋지만 참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듣기에 덜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한참 수다를 떨고 난 후 밖을 나서니 맑은 밤공기가 나를 반겼다. 새로운 곳에서의 도전을 계속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