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가도, 집에 도착한다

나를 이루는 조각들

by 글쓰는 트레이너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진학이 확정된 뒤 우리 가족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 간 집 근처에 다른 학교가 있었지만 전학을 가진 않고 그냥 진학 확정된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차로는 25분 남짓, 하지만 버스를 타면 빙빙 돌아 1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다.


등굣길엔 늘 부모님이 데려다주셨지만, 하교는 혼자였다. 학교 근처 정류장에서 탈 수 있는 유일한 버스는 배차 간격이 40분. 그걸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버스를 타도 뺑뺑 돌아가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려면 1시간 20분이 걸렸다.


더 빨리 집에 갈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했고, 어느 날 머릿속에 반짝이는 루트가 떠올랐다. 다른 버스를 타 중간 지점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딱! 맞춰 타는 방법이었다. 성공만 하면 50분 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엔 버스어플에도 안 나오는, 나만의 비밀 루트였다. 문제는 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등하굣길은 실험이었다.
지하철과 경전철을 갈아타는 방법도 시도해 봤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가장 느리지만 가장 단순한 루트였다.


고3이 되고 나선 전략을 바꿨다.
중간 지점에 있는 독서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부모님께 픽업을 받는 방식. 그 편이 시간도 덜 들고 효율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참 나다웠다.


그때는 '사색'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지만,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나는 왜 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문득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하곤 했다.


버스 안에서 공부를 하는 건 영 어지러워서 포기했다. 대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했다. 때론 즐겁게 상상하며 그 길을 즐겼고, 때론 그 길이 너무 지겨웠다. '오늘따라 느리게 느껴지네' 툴툴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방법이 새삼 많다는 것.
버스로만 가는 방법, 버스-지하철-경전철을 환승하는 방법, 지하철-경천철만 타는 법, 중간까지 버스로 가서 부모님 차를 타는 방법… 제각기 시간도 다르고 비용도 달랐다.


빠르다고 생각했던 길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더 느려졌고,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편할 때도 있었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늘 집에 도착했다.


그때 알게 됐다..
모로 가도, 결국 집엔 도착한다는 걸.

목적지가 같다면 어떻게 가든 상관없는 거 아닐까?



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답처럼 보이는 길이 늘 최선은 아닐 수 있다.


어떻게 가든,

그 끝이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충분히 잘 가고 있는 거니까.



그때의 나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방향 속에서 어떻게 내 걸음으로 즐기며 나아갈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분에겐 어린 시절,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온 통찰이 있었나요?


그때의 여러분은

어떤 길 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나요?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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