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던 동작이 조금씩 이해되고,
느껴지지 않던 감각이 스며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그간의 과정을 떠올려본다.
언어는 피상적이지만,
몸은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예전에 재활 트레이너 과정을 들었을 때,
강사가 말했다.
"큐잉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땐 그저 흘려들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며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같은 동작이라도 어떤 큐잉을 주느냐에 따라
사람이 받아들이는 감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말로만 설명하기보다,
몸으로 감각을 깨닫게 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발목이나 무릎 위치를 지시하기보다
반대 방향에서 저항을 줘 그 힘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 순간, 몸이 스스로 느끼고 배우기 때문이다.
언어가 얼마나 다르게 작동하는지 흥미롭다.
같은 흉추 신전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가슴을 열어주세요"가,
또 다른 이에게는 "등을 젖혀주세요"가,
혹은 "견갑을 내려주세요"가 더 와닿는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동작이다.
어떻게 해도 이해를 못 하시던 회원님이
갑자기 동작을 만들자 물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냥… 가슴을 내밀었는데요?"
그 말을 듣고 잠시 허탈했었다.
이렇게 사람은 같은 자세를
자신만의 언어로 인식하는구나, 그때 깨달았다.
어떤 회원님은 또 이렇게 물었다.
"트레이너마다 다르게 말하던데,
도대체 뭐가 맞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표현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자세를 두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덧붙였다.
"중요한 건 남의 큐잉이
항상 나의 몸과 상황에 꼭 맞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누군가에겐 ‘골반을 뒤로 기울이세요’가 맞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골반을 앞으로 기울이세요’가 더 맞을 수도 있죠.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니까, 큐잉도 달라지는 겁니다."
결국 트레이너의 역할은 지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언어를 찾아
몸이 알아듣게 돕는 일임을 새삼 느꼈다.
나 또한 안다.
선배에게 운동을 배울 때,
그분은 정확히 피드백을 주셨지만
나는 수직인지, 굽혀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
그래서 결국 영상으로 자신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내 몸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감각이 연결된다.
사진 한 장이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몸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순히 자세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인식하는 일이다.
회원님들이 어색해하는 동작,
그 답답함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움직임이 몸을 아프게 했다면,
앞으로의 중량을 다루며 안전하게 힘을 키우고 싶다면
바꿔야 한다.
처음엔 낯설지만,
반복하면 그것이 나의 움직임이 된다.
몸은 결국 배운다.
몸의 세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몸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감각은 움직임을 바꾸고,
바른 움직임은 몸의 힘을 길러준다.
바른 움직임에서 힘이 나오고,
그 힘이 쌓일 때,
일상은 한결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