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성숙한 다잉이라니!
"안녕은 슬프니까 뿅 할게요. 뿅!"
며칠 전 31세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유투버가 남긴 유언이라고 한다.
슬퍼하지 말라며 남긴 말이 더 애닲게 다가왔다.
슬픔을 애써 덜어내는 노력이 느껴져 더 슬픈,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연을 들어 보니, 저 짧은 말이 주는 여운이 꽤 묵직했다.
특히 내가 놀라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저 말을 한 사람은 호주에서만 살았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저렇게 미묘한 뉘앙스의 우리말 표현을 했다는 게 놀랍다.
역으로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오래 배워온 영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둘째,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뿅"이란 순식간에 사라질 때 쓰는 표현이다.
자신은 흔적 없이 사라질 터이니, 남은 사람들은 그저 잘 살아주기를 바란다.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미련도, 나를 기억해달라는 애원도 없다.
"뿅"이란 말의 어감은 그 어떤 말 보다 가볍다.
갑자기 스러진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남은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삶의 끝에 당도한 그 순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유머를 발휘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이토록 성숙한 태도를 갖춘 망자의 나이는 고작 31세였다.
셋째, 망자는 5월에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불과 5개월도 안된 사이에 사망한 셈이다.
퀴블러 로스가 말했듯,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대개는 부정과 분노, 타협과 우울을 거쳐서 수용까지 5단계를 거친다.
진료실에서 꽤 많은 이별과 죽음을 다루다 보니, 이 과정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안다.
사실상 1 달마다 1단계씩 거쳤다는 뜻인데, 믿기지 않는다.
나였다면 한참을 억울해하다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짧은 시간에 수용을 넘어선 단계에 이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만, 잊을만하면 우리는 죽음을 마주한다.
알던 이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며, 조금씩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선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니 논외로 하겠다.
결국에 남는 것은 톤 앤 매너, 태도의 문제이다.
"타인의 죽음은 무겁게, 나의 죽음은 가볍게."
노력하고 있지만 쉽진 않다.
연륜이 쌓이고 더 성숙해지면, 삶의 마지막 즈음에는 가능해질까?
오래 살고 봐야겠다.
며칠 전, 태풍으로 주차장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도 생각난다.
"어머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평범한 말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전달되는지 새삼 느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의 무게란.
세상의 모든 안타까운 이별에 애도를 표하며,
먼 곳으로 떠나간 모든 이들이, 언젠가 어디에선가,
'짠' 하고 나타나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