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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11. 2020

교관

"삶은 복불복이다"

체크리스트 암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애썼다. 입이 익을 때까지 수십 번 읽으면서 외웠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비행 용어들과 처음 보는 단어들이 가득했지만 무작정 암기했다. 기자로 일을 하면서 생방송 중계 원고를 외우던 습관이 남아서인지 다행히 암기 능력은 아직 살아 있었다. 원고를 받은 지 3시간쯤 지났을 때 다 외웠다고 판단하고 치프 교관(비행학교에 학생들과 교관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역할)인 랜든을 찾아갔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무슨 일이야?”

“체크리스트 다 외웠습니다.”

“정말? 이렇게나 빨리?”

“네.”

“알았어. 시작해봐.”

“Welcome aboard for your flight in this Cessna 152. You will find a seat belt either side of you, and I will be happy to demonstrate its design...” 


         

RFC 교관들


대부분 학생들은 원고를 받고 다음날 테스트를 받는다고 했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비행 공부를 시작한 나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테스트 결과 다행히 실수 없이 통과했다. 랜든은 교관을 배정해주겠다며 밖에 나가서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교관은 각 단계별 면장을 취득할 때까지 늘 옆에서 나와 함께 지낼 파트너다. 누가 내 교관이 되느냐는 학생들 초미의 관심사였다. 학교에 따라 학생이 원하는 교관을 배정해 주는 곳도 있지만 여긴 달랐다. 그냥 정해주는 대로, 잔소리 말고 받아들여야 했다.


교관에 따라 교육방식 스타일은 제각각이었다. 미국 특유의 쿨하고 유연한 성격의 친구처럼 친근하게 학생들을 대하는 교관이 있는가 하면 군 훈련소 조교 마냥 시도 때도 없이 화내고 윽박지르는 교관도 있었다. 또 본인 스스로 빨리 비행시간을 쌓고 항공사에 지원하기 위해 새벽부터 학생들과 비행하는 부지런한 교관도 있었고 늘 날씨 탓을 하면서 비행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교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성향의 교관을 만나 고생하면서 자격증을 따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교관의 ‘갑질’에 참다못해 학교를 옮기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처음 비행학교에 오면 먼저 온 선배들에게 교관에 관한 정보를 듣고 평판이 좋은 교관이 배정되기를 원했다.


나는 운 좋게 자가용과 계기 과정 모두 학생들에게 최고로 손꼽히는 교관들을 배정받았다. 그래서 이론수업을 제외하고 자가용은 3개월, 계기는 2개월 만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반면 사업용 과정은 학교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관을 만나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극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새로운 사람들을 겪게 된다. 성격상 잘 맞지 않는 사람과 길게는 1년, 적게는 두세 달 동안 1평이 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 팔, 다리를 맞붙인 채 비행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교관과 붙어 지내면 걸음걸이나 말투, 음식 취향은 물론 불필요한 입 냄새까지 파악하게 된다. 싫어도 받아들이고 나와 달라도 이해해야 했다. 학생의 실력에 대한 교관의 합격, 불합격 판단에 따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스테이지 평가에 대한 학생의 준비상태 역시 교관이 결정했다. 학생의 영어실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비행 교육을 중단하고 따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영어수업을 받아야 했는데 이 부분도 교관이 결정했다. 몇 년 전 강화된 미국 항공법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자격증 취득에 중요한 평가 항목이 됐다. 교관을 잘못 만나 자가용 면장 최종 평가에서 결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태국 학생도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단순히 비행 지식과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배웠다. 교관과의 호흡, 그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 그리고 학생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경쟁 등 그간 한국에 살면서 학교나 직장에서 경험했던 대인관계는 먼 이국땅에서도 존재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매한가지니까. 그래도 어딜 가나 이상한 놈은 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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