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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10. 2020

체크리스트

"무작정 외워라"

인천공항을 떠나 중간 경유지 두 곳을 포함해 2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오클라호마 털사 공항에 도착했다. 털사는 한때 미국 정유 사업이 호황기를 맞으면서 비즈니스맨들로 가장 붐비던 도시였다. 미국 정유 업계 주도권이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조용한 마을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국제’ 공항이란 이름처럼 공항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터미널 안은 한적했다. 긴 복도로 이어진 게이트를 빠져 나와 수화물 찾는 곳으로 나가자 학교에서 픽업 나온 한 백인 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교관인 제임스였다. 그는 비행 교관 일을 하며 시간당 20~30불의 저임금을 받다보니 남는 시간에 돈을 더 벌기 위해 학교 셔틀버스 기사일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출발해 30여 분 동안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도심을 구경했다. 10여 년 전 유학했던 캘리포니아나 유타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다지 크지 않은 나지막한 크기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다운타운을 제외하고는 대평원이 펼쳐진 전형적인 시골마을처럼 보였다. 미국 중남부에 위치한 오클라호마는 과거 체로키 부족과 같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미군에게 쫓기다 정착한 곳이었다. 그래서 주 곳곳에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이 있었다. 또 ‘털사’, ‘무스코기’, ‘세미놀’과 같이 인디언들이 쓰던 지명이 그대로 도시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학교는 리처드 로이드 존스 주니어란 공항 안에 위치해 있었다. 공항 옆으로 흐르는 아칸소 강 때문인지 사람들은 공항을 리버사이드라고 줄여 불렀다. 공항 안에는 모두 네 곳의 비행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로이드 존스 주니어 공항

학교에 도착한 나는 행정 사무실에 들러 학교 교장 유리와 인사를 나누고 사무직원인 칼리와 서류 작업을 했다. 칼리는 한국에 있을 때 이메일로 학교 정보를 계속 주고받았던 사이라 반가웠다. 궁금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면 정말 칼같이 정확하고 빠르게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런 칼리의 친절함에 넘어가 이 학교를 선택한 학생이 나뿐 만이 아니었단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서류 작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교관들이 모여 있는 학과 건물로 이동했다. 행정 건물과 학과 건물 사이에는 비행기를 세워두는 행어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세스나와 파이퍼 세미놀, 더치스 등 세 기종의 비행기들 20여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비행기를 보자 갑자기 흥분되며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정말 비행을 배우러 미국에 왔구나.’  


학교 도착 첫날 연방항공청 지정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마지막 상담진료를 보던 65세의 여의사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서 온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저널리스트인데 왜 에어맨이 되려고 하죠?”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하늘을 날고 싶어서요.”



칼리의 안내로 치프 교관인 랜든과 로스, 릭을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건물 안을 구경했다. 교관과 학생이 비행 전 후 서로 얘기를 나누는 좁은 크기의 브리핑룸 여러 개와 이론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 세 곳이 있었다. 

“안녕?”


Cessna 152 체크리스트

키가 작은 한 여학생이 지나가며 내게 인사했다. 나는 무심결에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그녀는 스페인어로 동료학생들과 수군거리며 내 곁을 지나갔다. 파나마 유학생들이었다. 학교가 파나마 정부와 계약을 맺으면서 70여 명의 전체 학생 중 절반 이상이 파나마 출신이었고 나머지 미국과 대만, 태국과 한국, 인도에서 온 학생들이 조금 있었다. 한국 학생들과도 만나 인사하고 학교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중 K가 “쉿”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다들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더니 랜든이 한쪽 벽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너희들, 내가 이번 한번만 넘어간다. 알겠지?”


모두들 랜든 눈치만 살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학교에는 엄격한 규칙이 하나 있었다. 교내에서 무조건 영어만 사용해야 했고 만약 이를 어기다가 랜든에게 발각되면 벌금으로 20달러를 내야했다. 그렇게 모인 벌금은 연말 적십자에 기부한다고 했다. 1년 동안 나도 여러 차례 랜든에게 적발됐는데 그때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적십자가 여러분의 기부에 감사할 거예요.


학생들은 이 규칙이 말도 안 된다고 불평했다. 과연 그 돈이 고스란히 적십자로 전해지는지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학과 건물 입구에는 지난 몇 년 동안 적십자로부터 받은 감사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랜든은 나를 따로 불러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는 조그마한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몇 장의 비행 이론 자료들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그것들을 최대한 빨리 외우라고 지시했다. 패신저 브리프와 캡틴 브리프, 세스나 152 체크리스트였다. 패신저 브리프와 캡틴 브리프는 쉽게 말해 승객들에게 전달하는 기내 안내방송 원고였다.


패신저 브리프 & 캡틴 브리프

비상 상황 시 조종사가 어떻게 조치할지, 어떤 활주로를 이용하고 현재 바람은 몇 노트인지를 간단히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체크리스트는 비행기 운항 시 지켜야 하는 절차와 점검해야 하는 계기들에 대해 나열돼 있었다. 생각보다 암기해야 할 양이 꽤 많아 보였다. 


사실 항공사에 입사하면 공부량은 비교가 안될 만큼 훨씬 더 많다고 했다. 미국에서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국내에서 면장 전환 시험을 볼 때 담당 평가관이었던 모 기장님은 이런 말씀을 전했다. 

조종사가 되기로 했잖아. 그럼 이제 요크 놓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돼.
그러니까 당신들은 길을 잘못 선택한 거야.


그리고 내가 딱하다는 듯 껄껄 웃으셨다. 그분의 조언처럼 조종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6개월마다 치러야 하는 심 평가 대비는 물론 기종이 바뀔 때마다 복잡한 기동 절차를 새로 숙지해야 한다. 조작법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일 정도로 암기하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은 조종사의 평생 과제다. 대학원 졸업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와 담쌓고 지내온 지 8년째였다.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새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했다. 난생처음 보는 낯선 비행 용어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짜증 내거나 불만을 털어놓을 대상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작정 외우는 방법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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