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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l 18. 2024

이혼가정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울증의 엄청난 지분은 부모에게 있다. 무조건.




 내가 가장 강렬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릴 시절의 기억은 7살 때 현관문 앞에서의 장면이다.

 "너, 아빠랑 갈래? 엄마랑 있을래?"

 어디 놀러라도 가는 건 줄 알고 당연히 자주 못 보던 아빠를 따라간다고 했다.


 그리고서는 엄마랑은 따로 살았다.

 그날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애를 데리고 완전히 헤어지는 순간이었나 보다.


 이미 누가 애를 데리고 갈 건지는 정해져 있었을 텐데,

 그날 내가 엄마랑 같이 있겠다고 했으면 엄마랑 살 수 있었을까?

 아빠는 운전, 운수 일을 해서 집에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는, 내 동생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친절하거나 살뜰히 우리를 챙겨주는 분이 아니었다. 제대로 밥을 상에 차려줘서 먹고 이런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굶지는 않았을 테니, 밥이라는 걸 할머니가 수도 없이 해주셨을 텐데, 그 기억이 없다 하면 할머니가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 그건 식사가 아니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냥 거의 혼자 살았다.


 나에게 따뜻하거나 좋거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없다.

 집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노는 장면도, 엄마랑 아빠랑 동물원 같은 곳에 놀러 가서 재미있게 놀던 장면도 남아있지 않다. 행복한 기억을 한 꼭지도 갖고 있지 않은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봐도 없다. 누가 내 생일상을 차려서 친구들 불러놓고 파티를 해준다거나, 바다라도 놀러 가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저런 특별한 기억 말고 일상적인 행복의 기억들도 남아있지 않다.

 진짜 그런 일들이 없어서 없는 건지, 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부모가 이혼했을 때 나는 일곱살, 내 동생은 네살이었다. 나도 불쌍하지만 내 동생은 더 불쌍하다. 서로 간에 속 깊은 이야기를 안 해서 모르겠지만 내 동생도 어릴 적의 추억이라는 걸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안 좋은 기억들만 있는데, 내 동생은 아예 기억이라 할 것들도 없는지도.


 그 뒤로 초중고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내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과 복잡한 감정들을 글 한편에 다 싣기는 어렵다. 떠올리고 글로 쓰자면 쓰리고 짜증 나는 기억들만 있다. 그것도 나의 일상이자 삶이었으므로 생각만 하면 펑펑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픔이 몰려오는 사건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애쓰면서 살아야 했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참 불쌍했다.

 지금 생각하면 10살이나 11살이나 되었을 어린 나이에도

 '엄마 아빠랑 이혼했다고 해서 손가락질받기 싫어. 똑바로 살아야지.'

 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케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정(이라고 할 수 없는)에서 살았기 때문에 완전히 모범적인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학군이 좋은 부자동네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늘 주변에 질 안 좋은 친구들은 많았고 그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놀기도 많이 놀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못 된 구석은 늘 갖고 있어서 공부를 완전히 놓지는 않았고,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학원도 한두 개는 다녔다. 그래도 학원비를 봉투에 넣어 내던 시절 학원비를 낼 때마다 집에 눈치가 보였다.

 

 미술학원과 서예학원을 못 다닌 것은 아직도 한스럽다.

 같이 놀다가 미술학원에 가야 된다며 궁시렁대던 친구에게 "내가 같이 따라가도 돼?"라고 물어서 미술학원이 어떤 곳인지 한 번 올라가 봤던 기억이 난다. 붓질하는 친구 옆에서 물감을 짜주었다. 나도 미술대회에서 상 받는 애들처럼, 이파리를 멋있게 붓질해서 나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영을 잘 넣어서 담벼락과 단풍 따위를 멋있게 나타내는 친구들은 미술학원에 몇 년은 꾸준히 다닌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이 부러웠다.

 

 초대받아 간 친구 집은 항상 우리 집보다 좋았다. 침대가 있으면 침구가 예쁘거나 깔끔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좋지도 않았던 빌라에 살던 한 친구의 집은 탑층이라 두 개 층을 썼었다. 걔네 방은 다락방처럼 되어 있었다. 사선으로 내려오는 창문과 핑크색으로 꾸며진 그 친구 방이 너무 예뻤다. 동화 속에나 나오는 집 같았다.

 그래도 가장 부러웠던 것은 어떤 친구 집에 꽂혀있던 세계명작전집이었다. 나에게는 책을 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었다. 그 친구 집에 꽂혀있는 갈색의 세계명작전집은 정말 부러웠다. 그 친구는 읽지도 않는데 엄마가 사줬다고 투덜댔다. 그럼 나한테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빌려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학교마다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어서 쉽게 책을 빌릴 수 있었다면 초등학생의 나는 심심했던 시간을 더 잘 보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기억이란 다 그런 기억밖에 없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뭘 못해서 억울했던 기억.



 초등학교 때 나는 엄마랑 몰래 만났다.

 2주에 한 번인가 내가 외할머니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엄마집으로 갔다. 엄마집에 가면 뭔가 맛있는 음식을 해줘서 먹고 티비보다가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동생이 왜 누나 혼자만 주말에 어디 가냐고 나는 왜 안 데리고 가냐고 물었다. 엄마한테 동생도 데리고 오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아직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중3 때, 동생이 6학년 때 같이 같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엄마를 못 보고 산 동생은 아직도 엄마를 엄마라고 편하게 부르지 않는다. 부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불쌍한데, 다시 한번 동생은 더 불쌍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가 그때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 그냥 동생은 엄마자식 아니냐면서, 얘도 맛있는 거 많이 못 먹는다고 그냥 데리고 갔었어야 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수학에 재미를 붙였다.

 

 변변치 못한 집안에 내 눈에 가장 잘 살아 보이는 집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인 작은 고모네 집이었다. 선생님을 하면 저렇게 살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중3 때 학원에서 엄청 웃기고 잘 가르치는 수학선생님을 만났다. 인수분해와 피타고라스 정리가 너무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너무 웃겨서 수학 학원에 가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선생님이 수학을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고등학교 1, 2 학년 담임 선생님은 같은 분이셨는데, 이효리를 닮은 예쁜 선생님이 우리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도 수학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얼굴도 이쁜데 옷도 매일 예쁜 옷을 입고 왔다. 심지어 수학도 잘 가르쳤다. 나도 매일 수학만 하고 앉아있으니 담임선생님도 수학을 열심히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을 하면 최소한 구질구질하게는 안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수학을 좋아하니 수학교육과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수학교육과에 입학하여 가장 좋았던 점은 경제적으로 쪼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과외가 들어왔고, 하루에 2개 아니면 3개를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생활비를 매달 드렸다.


 그리고 그건 족쇄가 되었다.

 나는 그 길로 가장이 되었다.

 가장인 줄도 모르고 가장이 되었다.


 나는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나도 과외를 몇 달 접고 유럽여행도 가고 싶었는데 방학 때도 과외를 쉬기 힘들었다. 방학 때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과외를 더 했다. 대학 다니면서 과외를 안 했던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대학에 가면 가정환경조사서 같은 것도 없고, 급식비 못 내서 칠판에 이름 적히는 일도 없을 테니 그냥 나 혼자 잘 살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똑같이 과외를 해도, 나 같은 애들이랑 어느 정도 살만한 안정된 가정에서 큰 애랑은 대학에서도 또 달랐다. 나는 과외를 해서 얼마를 벌면 그중에 내 생활비 쓰고 엄마한테 주고, 내 동생 등록금도 내야 했기 때문에 저금도 조금 하면 사실 남는 돈이 없었다. 그런데 여유 있는 애들은 집에서 용돈도 준다고 했다. 그래서 과외비는 다 모은다고 했다. 부러웠다. 어떤 선배 언니는 졸업할 때 4000만 원을 모아서 나간다고 했고, 어떤 선배는 과외비로 3학년 때 차를 샀다. 후배들도 동기들도 과외비를 모아서 방학 때 유럽여행도 갔다. 나는 방학이면 과외를 더 많이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이런 부러움과 억울함이 몰려올 때면, 어쩌겠냐 생각은 하면서도 이혼한 부모가 늘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임용도 되고, 결혼도 했다. 아이도 낳았다.

 

 착하고 구김 없는 남편을 만났다.

 이제 나는 정상으로 살 수 있어. 생각했다.

 지금은 부모가 이혼한 것이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안 끼쳐. 생각했다.


 나도 나와 내 동생처럼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을 세 살 터울로 낳았다.


 그런데 엄마가 되자,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들은 애를 키우면서 부모를 이해한다고 하던데

 내가 부모가 되자 부모가 나에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던 일곱 살의 나는 엄청 큰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일곱 살은 정말 조그마한 아기였다.

 게다가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네 살이었던 내 동생은 그냥 어리구나 했었는데, 내 아들을 봤을 때는 네 살은 진짜 아기였다. 말도 겨우 하는. 먹을 것도 작게 잘라서 줘야 하는.

 


 세상에. 이런 애들 둘이나 두고. 이혼을 할 수 있나?

 이혼하고 엄마가 안 키울 수 있나? 엄마라는 사람이 몇 년 동안 그 애를 안 볼 수가 있는 건가?

 유치원에서 애들 버스에 태워서 체험학습을 반나절 가도 걱정이 되는데,

 이런 어린애들을 몇 년 동안 안 볼 수가 있나?

 

  깨끗하지도 않던, 아무도 날 챙겨주지도 않던 그 할머니 집에 나를 보내놓고 뭘 먹는지, 어떻게 사는지 걱정은 했었나? 그때 그 어린 동생은 왜 안 본다고 했던 거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아빠도 증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린애들을 자기가 키운다고 데리고 왔으면 뭘 해서라도 돈이라도 제대로 벌어왔었어야지, 직장은 늘 다녔다가 말았다가. 술만 마시고 생활력도 없었다. 그런 환경에 우리를 버려두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리고 내가 너무 불쌍했다.

 아가였을 내 동생이 너무 불쌍했다.


 행복한 가족이라는 것은 맛도 못 보고 큰 내가 너무 불쌍했다.




 그런데, 왜.

 왜?

 왜, 사과를 하지 않지?


 이 정도면 정말 자식한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하지 않나?


 이런 억울함과 서러움들은 내가 모르고 살았어도 되는 감정들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리고 쓰린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 놓고, 나에게 왜 미안하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까?

 미안하지 않는 걸까? 자기들도 이혼이라는 인생의 쓴맛을 봤으니 본인들도 살기 힘들었다고 말할 참인가?


 사과해야 된다고 본다.

 평생.

 

 이혼하는 자들에게

 "그래. 애 없을 때 잘 헤어졌어."

 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최고의 위로이자 축하다.

 만나지도 않은 그들의 정자와 난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팡파레를 보낸다.

 야, 니네 태어났었으면 개고생이야. 안 나오길 잘했다. 축하해.


 나는 학교에서 많이 본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을.

 요즘은 워낙 흔한 일이기도 하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혼했다고 해도 정성으로 부족함 없이 키우는 집들도 많다. 그래도 나는 그 아이들이 불쌍하다. 사고 치고 막 나가는 애들보다 착한 애들이 더 안 됐다. 공부 잘하고, 반장 부반장 임원 하고 학교 생활 열심히 하는 반듯한 아이들이 백배 천배는 더 불쌍하다. 그 부모는 뿌듯하고 기특하게 느끼겠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

 지가 제일 불쌍한 줄은 모르고, '그래. 부모가 저렇게 싸우는 거 보느니, 아예 이혼하고 평온한 게 낫지.' 하며 애써 자기 위로하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애처롭다. 나중에는 턱이 아플 텐데 지금은 입을 앙 다물고 힘겹게 살고 있을 그들이 딱하다. 심지어 부모 이혼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인데, 커서 효도할 생각까지 하는 걸 보면 진짜로 등신 머저리 같다. 빨리 정신 차리고 니 인생 니가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잘 큰다고 고생했어.

 근데, 니네도 언젠가는 나처럼 현타 온다.

 집에 가장처럼 살지 말고, 너무 착하게 살려고도 하지 마. 니 팔자 니가 꼬는 거다.

 너가 버는 돈은 꼭 너가 쓰고 싶은 데다가 후회 없이 써.

 너 술 먹고 옷 사고 여행하는데 번 돈 다 써도 괜찮아.

 그래도 안 죽어. 니들 식구들도 안 죽어.

 대학 가면 꼭 술도 많이 마시고 클럽도 다니고, 망나니처럼 마음대로 살아보도록 해. 후회 없도록.





 이혼가정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면, 직장인이 되면, 결혼을 하면, 애를 낳으면 점점 괜찮아질 알았다. 그런데 억울함만 쌓인다. 엄마가 되니 더 심해진다. 내 딸이 열 살이 되니 나의 열 살 때가 생각나고, 내 딸이 중학생이 되니 중학생 때의 내가 가엾다. 내 아들이 초1이 되니, 내 동생 초등학교 입학은 누가 도와줬나 싶고, 내 아들이 태권도를 다니면 그때 내 동생도 태권도를 배우고 싶었을까 싶다.


 이런 생각이 일평생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데, 우울하지 않을 수가 있나?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참기만 하던 캔디는 성인이 되면 우울증 환자가 됩니다. 백퍼.



 그렇다고 상담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일곱 살의 나를 불러 꺼내기는 싫다.

 "누구야, 고생했어. 너 어른들한테 징징대도 되고 그렇게 착하게 안 살아도 돼. 어리광 부려도 괜찮아."

 라고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 정말 웃기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어린시절의 나한테 어리광 부려도 괜찮다니, 이 무슨 허황된 소리인가?

 나한테 사과해야 될 사람이 떡하니 살아있는데, 왜 내가 과거의 나에게 직접 위로를 해줘야 하나?

 학교폭력도 이렇게 해결하면 되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돌아가서 혼자 위로해주는 방식으로?

 가해자가 직접 사과해야지. 사과를 받아내야지. 누구에게든 잘못한 게 있으면.


 그래도 말 못 하겠다.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지랄지랄 하고 싶은데 못 하겠다.

 아빠는 그냥 연을 끊고 싶은데, 착한 남동생이 자꾸 연을 안 끊고 자꾸 어디선가 실을 질질 끌고 온다.

 미치겠다.


 


 지난주에 컨택트라는 영화를 봤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김상욱 물리학자가 하는 리뷰를 봤다.

시간과 시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김상욱 교수가 설명해 줬다.

'과거'라는 것은 물리학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과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과거'라는 것은 나의 '기억'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과거'는 '기억'이다.


 아. 그냥 이렇게.

 물리학적으로 '과거'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효리는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리게

 엄마한테 좋은 기억을 자꾸 말해달라고 하던데.

 나는 나쁜 기억을 덮어버릴 좋은 기억은 갖고 있지 않으니

 과거가 기억이라면, 그냥 기억 자체를 지우는 게 나을까?


 자꾸 꺼내서 위로하려고 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너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많은 위로를 준다고 하는데 이것도 완전 개소리다.

 그래서 뭐, 가만히 있으라고? 어쩔 수 없으니까?

 이게 위로냐?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힘들어야 하죠?"

 따져 묻고 싶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커버린,

 억울한 캔디를 품고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답 없는 위로를 보낸다.


 힘들었죠? 나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어떡해요?

 그렇지만 보상받고 싶어요. 그렇죠?













다음 이야기 : 나도 우울한데ㅡ 이제, 우울한 건 꼴도 보기 싫어

+ 처음부터 생각했다. 우울증에 잠식되지 않으리라고

+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그만 우울하자

+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 약보다 병원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생각이야

+ 언제나 나의 방어기제는 '승화'였다

+ 이번에도 치트키는 승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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