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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l 13. 2024

내가 바로 완벽주의 개복치다!!

우울증의 지분을 따져보자 - 완벽주의의 역사



<완벽주의의 역사>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인 줄 몰랐다.

제대로 하고, 아예 할 건 시작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각을 딱! 재보고 '잘'있는 것들만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면 끝을 봤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여자예요."

그리고 해냈다. 그러면 칭찬과 인정이 돌아왔다.


"역시"

"대박"

"헐. 천재네"


이게 뭐라고.

왜 그렇게 '제대로'하는 것에 집착했을까?


중간 정도 되는 건 아예 시작도 안 해서 그건 0점이다. 시작한 일을 100점을 맞더라도 평균내면 결국엔 50점 언저리이다. 0은 지우고 100만 생각했을까?


나는 내가 쿨가이인 줄만 알았다. 수학선생님답게 '똑 부러지고' 칼같이 일 처리하는 사람.

그런데 나는 진짜로 똑 부러져버렸다.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를 혹독하게 채찍질하는 완벽주의자. 같은 뜻의 다른 말로 하면 포기주의자.



나의 완벽주의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면 이런 특성이 있다.

 1. 나는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한다.

 2.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은 최악이다.

 3. 나는 A라는 부분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B라는 부분은 무조건 잘해야 된다.  

 4. 욕먹기 싫다.

 5. 하면, 잘하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쯤의 일이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엄마가 점심으로 소고깃국을 주셨다. 엄청난 편식자라 계란이랑 햄 같은 것만 먹고살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다른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입이 짧다.)

 으- 그런데 소고깃국에는 엄청난 크기의 파가 들어가 있었다. 소고깃국은 국이니까 그냥 먹을 수 있는데 손가락 마디만 한 대파가 웬 말인가. 난 저 대파를 못 먹는데. 그래서 일단 국을 먹으면서 대파를 입 한쪽으로 다 넣기 시작했다. 구석으로 몰아넣은 대파는 씹을 때마다 물컹물컹하고 이상한 찐득한 물 같은 게 나왔다. 우웩.

 "잘 먹었습니다~!"를 외치고 곧장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대파를 다 뱉었다. 뿌듯했다. 나는 편식자이지만 친구 엄마가 주신 음식은 맛있게 싹싹 먹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별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기억이 가끔씩 난다.

 왜 그때, "저는 파를 못 먹어요."라고 말 못 했을까? 파를 못 먹는다고 하면 나를 안 좋게 생각할까 봐 그걸 걱정했었나? 그러면 어른이 되어서는 나아졌을까?



  몇 년 전, 학교 근무 만기가 되어 새로운 학교로 발령받았다.

 2월에 출근해서 선생님들과 인사도 하고, 새 업무도 배정받고 인수인계도 해야 한다. 2월 첫 출근일, 전체 연수에서 새로 발령온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첫인상은 언제나 중요하니까 단정한 차림으로 인사했다. 오전 연수 후, 학년을 같이 할 새로운 선생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보통 새 선생님들이 오는 2월의 첫날은 대접하는 의미에서 조금 맛있는 걸 준비해 주신다. 연수도 업무도 큰 관심 없던 나는 점심메뉴를 가장 기대했다.


 점심은 초밥도시락이었다. 딱 봐도 고급진. 학교에서는 잘 구경할 수 없는 화려한 비주얼의 초밥도시락.

 선생님들은 엄청 환호했다. 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초밥을 못 먹기 때문이다. 이건 그 소고깃국의 대파를 먹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원래 같이 근무하던 사이라면, "저는 초밥 못 먹어요. 제 것 드실 분?" 하며 초밥 좋아하는 선생님께 드리고 나는 계란초밥이나 먹으면 끝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자리에서, 모두가 좋아하고 있는 이 분위기에서, 나 혼자 똥 씹은 표정으로 깨작깨작 될 수는 없었다. 어떡하지. 초밥 먹으면 죽나? 그냥 먹기로 했다.

 

 


 억지로 먹었다. 꾸역꾸역.

 일단 계란초밥이랑 새우초밥, 소고기초밥부터 먹고, 광어(?)(사실 잘 모름)처럼 보이는 흰살생선이 올라가 있는 초밥을 먹었다. 우웩. 물컹물컹. 진짜 싫다. 학교에서는 한쪽 입에 몰아넣고 화장실에 가서 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씹어 삼키기로 했다. 비릿하고 차갑고 물컹거렸다. 구역질이 가끔씩 올라왔는데 일단 사람들 속도에 맞춰 몇 개를 먹었다. '이제 저는 배가 불러요'할 정도의 양이 되자 젓가락을 놓았다. 초밥을 욱여넣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10살의 대파를 욱여넣던 나는 왜 30대 후반이 되어서도 초밥을 욱여넣고 있었을까?

 

 결국에는 눈치 보느라 그랬던 것이다. 유별난 사람이 되기 싫다는 마음의 소리.

 남의 시선. 그놈의 시선.




 학생 때도 그랬지만 교직에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싸운 적이 잘 없다.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피했다. 저 사람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사람이니 그냥 내가 맞춘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손해 보고 일을 더 하고 말았다. 뭐가 잘못된 것 같아도 민원전화 한 번 속 시원하게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냥 양보하면 갈등이 없었다. 아무랑도 안 싸우니 성격이 좋은 줄만 알았다. 원만한 성격.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원만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라고 표현되는 사람이 진짜로 원만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인지. 본인이 저런 평가를 받고 있다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원만한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언제나 '아무거나'를 외치는 나 자신으로 살아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늘 '다 좋아', '나는 아무거나', '너 하고 싶은 거 하자', '너 먹고 싶은 거 먹자'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은 남들이 느끼기에는 한없이 원만한 성격이다. 주장도 불만도 없으므로.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거나,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성격이 나쁘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호구로 대할 만큼 바보 같지는 않았고, 내 주장을 못해서 딱히 답답한 적도 없었다. 뭐, 만족했다.  


 그런데 이런 내 성격이 언제 가장 싫었냐 하면, 엄마로서 '내 자식 내가 지켜'파워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의 일로 다른 엄마에게 항의(?) 조의 전화를 받을 때 정말 싫었다. 유치원이나 저학년 아이들의 갈등이란 엄청난 일들도 아닐 뿐더러, 일방적인 것이 없다. 우리 아이가 걔한테 뭐라고 했으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심지어 우리 아이가 이때까지 100을 당하고 참다가 50 정도 말 한마디로 쏘아붙였을 뿐인 경우도 있었다. 나는 100을 당할 때 가만히 있었지만 이 엄마는 50을 당한 것에 격분하여 나에게 전화했을 때는, 정말 답답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당한 100에 대하여 따박따박 따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평소에 내가 서운하고 손해 봐도 그냥 지나가는 성격이었다. 속상하지만 작은 일들은 이미 다 까먹어버렸다. 100의 일들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도 않았고, 거기서 그걸 말하고자 하면 서로 싸우는 것이 되니까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고 끊기 일쑤였다.

 

 왜 말을 못 했을까? 나도 할 말 많은데. 나도 니들 애 잘못한 거 많이 알고 있는데.




 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쌈닭 같은 선생님들이 있다. 손해 보는 것은 단 한 가지도 못 참고, 조금이라도 뭔가 합리적이지 않다 느껴지면 바로 전체메시지로 다다다다 쏴 버리고, 심지어는 직접 달려가서 관리자와 싸운다거나 교육청에 바로 민원을 넣어버린다거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매일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유별나다 싶을 때도 있지만,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나는 왜 저렇게 못 싸울까?

 나는 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신조로 살고 있을까?

 나는 왜 풀보다 빨리 누울까?

 나는 왜 민초의 삶을 살고 있나?


 이것은 논리적 사고의 결과이기도 하다.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싸우는 것도 하나의 퀘스트라, 나 같은 완벽주의자한테는 그 결과가 '승리'로 끝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따박따박 따지고 들 자신도 없고, 나보다 더 센 사람한테 대거리하기에는 내 멘탈은 유리다.  


 남들이랑 안 싸우는 게 성격이 좋은 줄 알았는데,

 나는 유리멘탈 개복치였다!!!!!!


 후.










<어린 완벽주의자들>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한다는 점에서 예정된 실패자다.
불행의 씨앗을 품고 살기 때문에 항상 초조하고, 때때로 우울하다. 스스로에게 높은 이상을 강요하고 부족함을 나무라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예정된 실패자였다.


'대충 살자'

'월급만큼만 일하자'

이런 다짐을 해봐도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충 살기로 했습니다만?-->

<---대충 라이프>

<--- 할 말 당당하게 하는 법>


따위의 책을 읽고 연습을 해봐도

대충 못 살고, 할 말을 당당하게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 따위는 책을 읽거나 마음먹는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니다.

대충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이제 나이가 마흔을 넘어간다.

내가 할 말이 있고, 해야 될 말이 있다.

해야 될 말은 조금씩이라도 내뱉어보고

누가 나를 찌르면 째려보기라도 해야겠다.



나는 초밥을 안 먹는다고 당당하게 말해야겠다.


지금 나랑 초밥 안 먹어도 다른 사람들이랑 먹을 수 있잖니?

초밥 먹는 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잖아?


 

소심하지만 쫄지말고, 강단있지만 우아하게.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다음 이야기 : 이혼가정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 나는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는 해준 게 있다고 생각할까

+ 엄마도 아빠도 없이 이 악물고 살아온 나를, 아무도 모를걸

+ 알아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사과는 받고 싶다

+ 왜, 사과를 안 해?

+ 어른이 되어도 한 구석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 꽃을 사러 가다가 길거리에 앉아 펑펑 울었다. 누가 보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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