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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l 10. 2024

우울증과 자식새끼

우울증의 지분을 따져보자


 나의 우울증의 원인을 분석해 보자면, 부모와 자식이 20% 정도는 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는 같이 살고 있지 않으니 적당히 연락을 덜 하며 모른 척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았으니 나의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다 늙은 부모에게 내 아픔을 치료하라 뭐라 할 수 없다. 있어 보이게 말하면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주는 과정이라 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체념이다. 덮는 것이다. 어쨌든 부모의 영향력은 내가 의식적으로 줄일 수도 있고 무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간다.




그런데 자식은, 이건 진짜 골 때린다.



 자식새끼(내 글의 어디선가에는 자식에게 사랑만 주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것을 주장하고 싶기는 한데 이 글에서 만큼은 자식새끼라는 표현을 써야겠다.)는 끊임없이 날 미치게 했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한테는 '나 우울증이래' 하고 말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지금 왜 출근을 안 하고 있는지, 평일 오전에 어떻게 만남이 가능한지 등의 내 근황을 설명하기가 쉬웠다. 정신과를 다닌다거나 약을 먹고 있다는 것도 요즘에는 아주 드문 일도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게 우밍아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엄마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알려야 할까?

 알려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까?

 엄마 우울증이니까 너네 이제 말 잘 들으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자식이 유아일 때는 너무 어리니까 말하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럼 초등학생이면 말해도 될까? 초등학생이면 몇 학년부터?


 고민을 하자면 끝도 없고 명확한 답도 없었다.

 내가 읽어본 우울증과 관련한 대부분의 책에서는 우울증은 가족과 친구들의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꼭 지지적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이해와 지지에 어린 자녀들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한다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처음 우울증을 진단받은 날, 남편은 "이렇게 된 이상 애들한테도 우울증이라고 다 이야기하고 말이야, OO이(딸)한테도 이 참에 말 좀 잘 들어라고 해야겠다!!"라고 했다.

 남편은 평소 나의 감정 기복과 절망감과 좌절감은 우리 딸의 사춘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나도 동의한다. 아무리 사춘기라 해도,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변덕과 고집과 극강의 짜증이 온 가족을 괴롭혔다. 완전 깡패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우밍아웃을 하자고 하는 남편의 제안에는 단호하게 싫다고 답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접했던, 엄마가 우울증이었던 몇몇의 학생들이 스쳐갔다. 그들에게서 느껴졌던 알 수 없는 우울감의 그늘과 불행했던 그 가정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학교 선생님인 내가 표면적으로 알게 된 것만 그 정도이니 내가 모르는 가족의 속사정은 더 심할 것이고 그 어린 자녀들의 상처는 더 깊을 것이다.


 나는 좀 많이 누워있고, 움직일 힘이 없는, 우울보다는 무기력자에 가까웠다. 병원에서는 우울증이라고 했지만 진짜 내가 우울증 환자라고 하기에는 경계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내가 좀 쉬다 보면 괜찮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언제 '괜찮은 정도'에 다다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무기 삼아 아이들을 순종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해봤자 이 인간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도 만무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우울증이 있는 엄마의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학교 일 때문에 좀 힘들어서 올해는 잠시 쉬는 거야'하고 라이트 하게 설명은 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진지하게 내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직장에 나가야 할 엄마가 휴직을 하고 집에 앉아 있지만 겉으로 봐서는 몸은 멀쩡하니 자기들도 평소의 엄마와 똑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희생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져야 했다. 딸은 여전히 지 멋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도 배려 같은 것은 뇌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된 사춘기 깡패 소녀는 엄마의 상태를 봐가면서 짜증의 정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숙제하다가 자기 방에 오라 해서 가보면 왜 왔냐 나가라 하고, 옆에서 봐주다가 다 됐다 싶어 나가면 나가라는 말을 안 했는데 왜 나가냐고 소리친다.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면 말투가 듣기 싫다거나 목소리가 왜 이렇게 크냐며 난리를 치고, 나도 기분이 나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왜 가만히 있냐고 난리다. 나는 고3 수능 문제까지 설명 가능한 수학 선생인데, 수학을 왜 이렇게 못 가르치냐고 고함을 지른다. 설명을 하면 답만 알려달라 하고, 답을 알려주면 설명을 왜 안 하냐고 한다. 설명을 해달라고 해서 설명을 해주면 왜 가르치려 드냐고 소리를 쳤다.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주는데, 왜 가르치려 드냐니 환장할 노릇이다.



 어느 누군가 분노의 감정을 상실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딱 반나절만 우리 딸의 숙제를 도와주는 역할을 시켜주고 싶다. 상실한 분노버튼을 바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 빡치는 건 저런 상황에서 대꾸를 하거나 예의범절을 들먹거리며 딸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가 맞게 되는 결말은 '파국'뿐이라는 것이다. 전두엽이 고장 나버린 무서운 사춘기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것은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다. 차라리 꿔다만 보릿자루처럼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닫고 눈을 멀뚱멀뚱하며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낫다. 화가 잔뜩 난 청소년에게 공감해 준답시고, '구나 구나 그랬구나' 요법을 잘못 쓰다가는 그의 손에 있던 샤프에 의해 자상을 당할 수도 있다.

 경험상 가장 좋은 방법은 차라리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하는 것이다. '나는  쓰레기통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자체는 감정이 없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에 몇 시간만 충실하게 수행하면 파국의 고비는 넘길 수 있다. 다년간의 사춘기를 상대하며 힘들게 얻은 노하우이니 믿고 실천해도 된다.



 참아라. 끝까지 참아라.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나는 버럭이와 까칠이를 잃어버린 인사이드아웃의 라일리다'라고 끊임없이 되뇌며 이성의 끈을 놓고 한참을 견디면 된다. 그러면서 몇 시간을 견뎌내면 보람차게도 어느새 갑자기 음악을 크게 틀고 랜덤플레이 댄스를 추며 깔깔거리는 사춘기 명랑 소녀를 만날 수 있다. 정상인이 상대하기에는 정말 난해한 인간이다.


 그렇게 버릇없이 자식이 하는 걸 가만히 받아주고, 듣고만 있으니 애가 계속 저런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흥! 모르는 남의 집안 사정에는 오지랖 떨지 말고 입 닫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싶다. 남의 집안 문제는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사춘기 자녀를 키우며 깨달았다. 


 나도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선생인데 예의도 도덕도 안 가르치고 애를 키웠을까?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혼구녕을 내서 조져놔야 한다는 것을 안 해봤을까? 다 해보았다. 실패했을 뿐. 그나마 밖에서는,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는 안 그런다니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춰준 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



 아이의 요란한 사춘기는 엄마에게는 우울증의 큰 요인이다. 

 특히, 사춘기를 모르고 지나간,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착한 딸이었던 엄마에게는 그 타격감이 더 클 것이다. 실제 아이 사춘기 시기에 정신과 진료를 받는 엄마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식은 자식이다.

 내가 우울한 건 내가 컨트롤해야 하고, 자식에게 그 짐을 씌워서는 안 된다.

 내가 저 인간의 사춘기로 인해서 우울해하고 있지만, 저렇게 유별난 사춘기가 오도록 키운 것도 엄마인 나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공부로는 스트레스 주지 않는, 포용력 만땅인 친절하고 포근하기만 한 엄마였다면 그의 사춘기가 저렇게 날카롭지 않았을 수도 있다.


 타인의 입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춘기 자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내가 너 때문에 우울해’, ‘너 사춘기 때문에 엄마 우울증 걸렸어’ 라며 본인의 우울증을 무기 삼아 굴종과 공부를 강요하는 엄마는 정말 싫을 것 같다. 저런 엄마는 필요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라는 책에서 저자는 마흔을 넘기는 나이에 자식과 부모들이 내 삶에 짐이 되어가는 것에 억울해하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지금 시기는 ‘내 배 위에 함부로 타지 말라고 그들을 다그칠 게 아니라, 배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할 때’ 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이성적으로든 동의하지만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더 큰 배를 만들 만큼 넓은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더 큰 배를 만들기는커녕 지금 있는 배도 폭파시키고 당장 다 내리라고 소리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만 자녀의 사춘기와 본인의 우울증을 함께하고 있는 엄마들에게 어떻게든 힘내보자고 외쳐본다.


"지금도 힘드니 배는 그대로 놔두고 감정 쓰레기통이나 더 크게 만듭시다!
 우리는 쓰레기통이 될 운명이에요!!
 우리 자식들이 쓰레기를 아무리 많이 던져도 더더더더 던지라고,
 엄마 쓰레기통 자리 아직 많이 남았다고 소리칩시다!"
 

 사춘기 엄마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최고의 엄마는 살아있는 엄마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오예!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최고의 엄마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살아계신 엄마들께,

 자식들이 그 어떤 굴욕을 주더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좀비처럼 다시 일어나 악착같이 살아서,

 앞으로도 '살아있는', '최고의' 엄마가 되어보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힘내요, 우리!







다음 이야기 : 내가 바로 완벽주의 개복치다!!!!

+ 나는 초밥을 싫어하는데 싫어한다고 말을 못 해서 꾸역꾸역 다 먹었어 ㅠㅠ

+ 아무랑도 안 싸워서 난 내가 성격이 좋은 줄 알았지

+ 나도 당당하게 싸우고 싶다

+ 그래도 풀보다 빨리 눕는 민초의 삶을 산다

+ 왜냐하면 드세게 싸울 자신이 없거등

+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이게 뭐야.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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