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고민은 '정신과에 가도 될까?' 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요즘 쉽게 간다고들 하는데 정작 본인 입장이 되면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정신건강의학과이다. 이빨이 아파서 치과를 갈까 말까 했을 때, 나중에 더 큰일이 생길까 봐(사실 돈이 왕창 더 깨질까 봐) 치과는 가는 쪽이라면, 정신과는 갈까 말까 했을 때, 참아보고 안 가는 쪽을 택하는 것이 안 우울했던 보통 사람들의 선택일 것이다. (더 늦게 가면 치과보다 데미지가 더 클 수 있는데 말이다.) 보험가입이 안 된다더라, 나중에 취업할 때 직장에서 다 조회한다더라 하는 괴담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정신과 진료를 본다는 것 자체가 뭔가 돌아올 수 없는 요상한 강을 건너는 듯한 느낌이다.
"나, 정신과 다니잖아."라는 말은 "나, 도수치료 받잖아."라는 말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떠벌리고 다닐 것도 아닌 것이 뭔가 하여튼 그렇다. 아픈 건 비슷한데 말이다.
정신과 진료를 직접 다녀보니, 의사 선생님들께는 미안하지만 일주일에 1-2번, 길어봤자 20분 내외의 진료와 화학적인 약물 치료로는 깊어가는 우울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원의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병원의 진료로는 우울증의 밀착케어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울증은 '경증'의 우울증을 이야기한다.)
약은 처방에 따라서 먹기는 해도, 약이 효과가 너무 있어도 걱정(의존하게 될까 봐), 효과가 없어도 걱정(효과가 없으니까 혹은 더 센 약을 먹어야 될까 봐)이다. 상담치료는 어떤 상담사를 만날지 모르고, 상담은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진료든 상담이든 어려움이 많다.
그렇다면 우울증의 치료에는 병원과 상담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잠깐, 우울증 고쳐주는 학원을 만들면 되잖아!"
미쳤네. 역시. 나는 천재다.
대한민국에는 없는 학원이 없으니까, 우울증도 학원에 보내버리면 되겠네.
좋았어. 그럼 한번 계획을 세워보자.
지금부터 할 일 없는 우울증 휴직자의 본격 망상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SF 싫어하시는 분들은 스킵하소서.
[우울증 고쳐주는 학원 계획서(안)]
1. 학원 이름
학원 이름을 <우울 학원>이라고 지을 수는 없다. <마음 수양>, <마인드풀니스>, <정신 수련> 등을 넣으려니 뭔가 살짝 사이비 같기도 하고 요가원 같기도 하다. 그럴듯한 이름은 있되, 그것이 우울증을 명확히 지칭하지 않도록 하고 오가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는 이름이 필요하다.
학원이니까 '아카데미',
마음이니까 '이너(inner)',
가꾼다는 의미로 '뷰티'를 조합해서
<이너뷰티아카데미>라고짓도록 하자.
네일아트 같은 것을 배우러 댕기는 느낌으로, 거부감도 없고, 좋다.
2. 입학 자격
모든 학원이 그렇듯이 그냥 입학할 수는 없다. 입학 전형을 통과하여 선별된 인원만 입학할 수 있다.
학원은 역시 소수정예니까.
(1) 자기소개서 제출 - 현재 본인의 우울증세, 병원진료와 상담 기록 및 경과, 입학 동기 각 500자 이상 서술
(2) 각종 심리검사 - 우울지표 검사 (우울지수가 평균에가까우면서, 낮을수록 입학에 유리)
(3) 추천서 - 부모나 친구, 직장동료의 현재 환자 상태 증언(?)하는 추천서
요 서류를 기반으로 우울정도, 나이, 직업, 성별, 사연, 성향 등을 분석하여 3-4명을 한 학급으로 편성한다.
3. 교육 내용
(1) 기초 위생 교육 - 양치, 세수, 샤워 등 더러워진 몸을 매일 씻도록 교육 및 확인
(2) 산책 및 야외 운동 교육 프로그램 - 자외선 차단 금지. 무조건 햇빛 쐬야 함.
(3) 인간관계 기술 교육 - 하고 싶은 말 당당하게 하기, 싸울 때는 싸우기 등 앙칼지게 사회생활 하는 법 교육
(4) 병원 모의 진료 프로그램 - 병원 진료 가서 어버버 하지 않도록 조리 있게 증상 말하는 법 연습하기
(5) 독서 토론 프로그램 - <우울할 땐 뇌과학> 읽고 독서록 제출, 매주 1권 자유독서 후 독서록 제출 및 토론
(6) 기초 재테크 교육 - 우울한데 돈 없으면 더 우울하니까, 기초 금융 교육
(7) (학생반은 필수) 공부하는 이유 찾기 프로그램
4. 수료 조건
(1) 자신의 인생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1편의 에세이로 작성하여 제출 후 심사
(2) 수면과 식욕 패턴 회복 확인
(3)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리스트 100개 작성
(4) 여성의 경우 화장과 머리손질을 시작했는지 확인
(5) 향후 일주일 동안 매일 다른 옷을 입을 계획 세우기
그냥 병원 말고는 답이 없나, 싶어 헛소리를 진지하게 적어보았다.
우울증 때문에 병원 말고 학원에 다녀도 괜찮다고 하면 가는 사람도 마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출석인정을 해주고 말이다.
"선생님, 오늘 땡땡이 이너뷰티아카데미 가는 날이라서요, 결석합니다. 내일 학교 보낼게요."
하는 부모님 문자와 아카데미 출석 확인서로 출석인정.
아이들도 훨씬 스트레스 덜 받고 다닐 수 있을 텐데. 어쩌면 병원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방학 때도 <방학 4주 Recovery Camp>, <방학 특강 - 자아 집중 회복 프로그램> 같은 것들 운영하며 학업으로 우울증 걸린 학생들 치료 좀 해주면 좋을 텐데 싶다.
셔틀버스도 운행하면 좋겠다.
학원에 가는 길이 부끄럽지 않고, 재미있고 신비롭고 남들이 부러워하도록, 버스 디자인은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처럼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