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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l 01. 2024

우울증 친구와 헤어질 결심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는 멀어집시다 



 소진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소진의 친구 은지는 우울증이다.

 은지는 가정에서 부모와의 불화를 겪고 있으며 집에 들어가면 외롭고 우울한 기분만 든다고 했다. 은지는 소진이에게 너에게는 무엇이든 말하겠다고 했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며 내 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상대라고 했다. 소진이는 공감능력이 높고 따뜻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은지의 감정에 깊게 공감되고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따뜻한 가족의 케어를 받지 못하는 은지가 불쌍하기까지 하다.

 은지는 본인의 속마음을 소진이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다며, 가정에서의 일, 슬픔, 외로움, 부모에 대한 분노, 소외감 등을 소진이에게만 털어놓는다. 은지는 소진이에게 너는 세상에서 자기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며 가족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다.

 은지는 자해를 시작했다.
 손목을 그으면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팠지만 그 아픔보다 꽉 막힌 감정이 탁 트이는 듯한 해소감이 자해를 멈추지 못하게 했다. 자해를 했다고 소진이에게 말했다. 소진이는 깜짝 놀랐다. 울었다. 울면서 왜 그러냐고, 자해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소진이는 은지가 점점 걱정되었다.
 하루종일 머릿속에는 은지 걱정밖에 없었다. '은지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나만이 은지를 봐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또 자해를 한 것은 아닌지, 더 심한 것을 시도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은지의 안위를 끊임없이 확인했고 손에서는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위험한 짓을 한다면 어떻게든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등교를 준비하며 소진이는 은지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십 번의 전화 끝에 연결이 된 은지는 또 손목을 긋고 화장실에 있다고 했다. 소진이는 울면서 119를 불렀고 은지의 집으로 달려갔다. 은지의 손을 잡고 울면서 앰블런스에 함께 타고 병원까지 갔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 나를 봐서라도 자해만은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내일부터 은지 옆에 함께 붙어 있으며 은지가 다시 이런 나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 생각했다. 학교 가는 것보다 내 소중한 친구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했다.


 이 둘은 건강한 친구 사이의 관계인가?

 

 은지는 소진이가 지켜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소진이는 은지의 생명의 은인인가?

 소진이는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 학교도 가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은지 옆에 있어주어야 하는가?


 나의 딸이 소진이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라고 하겠는가?

 은지는 소진이의 진정한 친구인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인가.

 은지는 소진이에게 의지하고 있는가, 의존하고 있는가.

 은지는 소진이를 신뢰하는 것인가, 지배하는 것인가.




 이것은 어느 커뮤니티에 어떤 엄마가 고민으로 올린 사연을 조금 각색한 것이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자세한 상황도 나의 상상력에서 나온 픽션이다.) 그 엄마는 본인의 딸이 자해하는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가주어야 한다며 그날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했고, 그다음 날도 친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올렸다.




 우리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답답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찾는다.

 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찾아 전화를 건다. 그들은 솔로몬들이다. 아이의 사춘기로 힘들 때는 오은영 솔로몬, 학교에서의 업무문제가 있을 때는 카네기 솔로몬, 남편이나 시댁 문제로 힘들 때는 김미경 솔로몬. 자식이나 부모 문제는 김창옥 솔로몬.

 

 고민의 유형에 맞는 솔로몬과 대화하며 답을 찾는다. 시원하게 해결책을 받으면 너무나 좋고, 해결책을 받지 않더라도 갑갑한 상황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자체로 답답했던 마음이 풀린다.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 올해는 전화하기도 조심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히스토리가 쌓여가는 일이라 사건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설명하며 상담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화를 했던 사람에게 계속 전화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도 전화했는데 오늘도 또 전화해서 이런 이야기하면 싫어하겠지?

 얘도 애가 어린데, 애 저녁 주고 놀아줘야 되는 시간에 이런 전화받으면 짜증 나겠지?

 내가 너무 징징대는 거 아닌가?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남에게 계속 해도 될까?

 

 하는 생각에 쉽사리 고민을 지속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면 어김없이 전화를 하곤 했다. 길게 통화하고 끊으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이 통화가 얼마나 기 빨리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미안했다.


 우울한 기분은 전염된다.

 우울한 기분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등 함께 있는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은 쉽게 타인에게 전파된다. 이것을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 또는 '정서 전염'이라고 한다.  감정 전염이란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 말투, 목소리, 자세 등을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자신과 일치시키면서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경향을 뜻한다. 굳이 이런 학문적 정의를 끌어오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 나는 사람이 있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의 이야기이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때 친했다가 대학교 때 잠시 멀어졌었다. 졸업 후 각자 취업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친구도 많았던 그 친구와 함께 놀면 말도 잘 통하고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친구였다.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해버렸으면 차라리 더 잘 지냈을 텐데, 그런 쿨함이 그때는 없었다. 나보다 모든 면에서 조금씩 잘난 것 인정하기 싫은 여고생의 미묘한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여고시절의 그 친구는 친하지만, 부러움과 질투가 함께 뭉쳐있던 친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만난 그 친구는 몇 년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아서 육아휴직을 했다가 복직한 상태였다. 세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정신없는 워킹맘이었다. 집에 와도 쉴 틈이 없었고 아이를 재우고 나도 같이 쓰러져서 자다가 아침 출근시간을 맞이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친구가 저녁, 늦은 밤, 새벽 12시, 1시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연락이 왔다. 카톡이 쉴 틈 없이 오고 그 내용도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내용들이었다. 정상적인 문장이 아니었고 대답하기도 힘든,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이상한 내용들의 카톡이었다. 몇 번은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대답과는 상관없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의 카톡이 계속되었다. 그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는 조울증의 조증 상태 같았달까. 여하튼 분명히 정상은 아니었었던 듯싶다.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카톡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수백 개의 카톡에 답할 수도 없었거니와 일과 육아로 힘들어 죽겠는데 이 친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락을 받지 않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내가 그 친구의 그 맥락 없는 카톡폭탄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어야 했을까?

 어떤 일이 그 친구를 불안하게 하고 힘들게 했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주고 같이 대책을 논의해줬어야 했을까?


 지금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손절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야 늘 동등할 수만은 없다. 내가 의지해야 되는 관계도, 내가 의지할 상대가 되어주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나를 갉아먹는 상황에 몰아넣는 친구라고 하면 친구 아니라 가족이라 할지라도 멀리해야 한다.


 내가 힘든 상황에서 상담해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많이 의지했다. 병원진료나 약보다도 주위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가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친구와 동료들에게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내가 힘들고 우울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가 나에게 어려움을 털어놓는다면 기꺼이 그 어려움을 들어줄 시간을 낼 것이고 그 힘듦을 나눌 수 있도록 내 어깨를 내어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를 감정적으로 너무나 소모시키거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파괴적인 문제라면 나는 언제든지, 그가 누구일지라도 헤어질 결심을 할 것이며 실행에 옮길 것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내 넋두리 전화를 받기 힘들어하는 기색이 있거나 한두 번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거나 답이 없다면 빨리 눈치를 채고 조금 쉬어야 한다. (물론 판단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우울증이므로...) 당장은 섭섭하겠지만 나의 어려움이 그의 곤란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의지는 괜찮지만 의존은 안 된다. 나도 모르게 나의 우울증을 무기로 하여 그를 내가 앉은 우울의자에 나와 같이 꽁꽁 묶어두고 있을 수도 있다.

 우울증을 갖고 있는 환자들은 그의 깊고 어두운 감정과 생각을 상담사나 의사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 친구나 동료를 의사나 상담사로 여긴다면 곧 그 관계는 비대칭의 관계가 되며 곧 깨어질 것이다.



 반대로 우울증을 친구나 가족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도 그 우울의 감정이 본인에게도 침습해 온다면, 반드시 거리 두기를 하고 본인을 지켜야 한다. 본인이 의사나 전문상담가가 아니라는 것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상담과 공감은 본인의 마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야 한다. 특히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들은 어두운 감정이 전이되어 훨씬 힘든 감정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감정의 전이를 막는 법을 훈련한 적이 없다. 우리는 수련받은 정신과 의사가 아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자로서의 자아와 현실세계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아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 그래서 감정이 전이되는 것을 막을 심리적 기술이 없다. 우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계속 들어주다보면 속절없이 우울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나만이 그 사람의 유일한 위안처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자체로 이미 덫에 걸린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우울한 그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내가 조금 힘들다고 그를 버릴 생각을 하니 죄책감이 드는가? 그것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그를 위해서는 중요할 수 있으나, 나를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 친구와 이별하기 전에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속의 나와 먼저 이별해야 할 것이다.


 헤어지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요란하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도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손절을 선언하지는 말고, 일이 바쁘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적절한 핑계를 무기 삼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떠나길 바란다. 그런 말도 하기 어렵다면 5번 연락이 오면 1번 정도 띄엄띄엄 답하는 식으로 한뼘씩 멀어지기를 추천한다. 그래도 완전히 손절할 친구는 아니라면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라는 멘트 하나로 여지를 남기던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인연이지만 헤어지는 것도 인연이다.

 잘 만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헤어질 때는 결단이 필요하다.

 나를 치는 사람과는 하루빨리 헤어질 결심을 하자. 온전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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