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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n 27. 2024

08. 우울증 환자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내는 경고장

진단서만 있으면 됐는데, 진짜로 우울증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는 우울증 환자가 없다. 없었다. 

 

 내가 나름 모범적이고(우울증 환자들이 모범적이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다) 건강한 무리에 속해있었던 것인지, 어쨌든 가끔 우울하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병원에 다니면서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며 꾸준히 치료를 받는 사람은 절친 범위 안에는 없었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하자 주변인들은 다들 조금씩은 당황했다. 각자의 방법대로 나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넸다. 내 주변 친구들도 현실세계에서 우울증에 걸린 이를 처음 대해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좁은 인간관계 안에서 살았었나 보다. 그래서 우물쭈물 그들이 급하게 건넨 말들은 일정한 방향성이 없었다. 

 예를 들면, '병가를 내야 되니까 약은 받았지만 우울증이 심각하지 않을 거니까(어떻게 앎?) 약은 먹지 마.'라던가 '우울증 약은 먹으면 도움 된대, 꼭 먹어.'라던가 하는 말들이었다. 다들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나 우울증이래' 하는 친구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주라는 안내가 없다. 자료도 없고 책도 없고 심지어 방송이나 기사도 없다. 



 나와 친한 어떤 사람이 우울증이다. 

 그렇다면,

 그 가족들은 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남편이나 아내가 우울증이면 그 배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나 아빠가 우울증이면 그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식이 우울증일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전혀 없다. 우울증은 그 감정과 정신 체계가 잠깐 고장 난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이 본인의 힘으로 우울증을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주변인들의 도움과 태도가 회복에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에 대한 조언이라던가, 갖추어야 할 자세라던가 그런 것들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다. 


 물론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에는 '남편이 우울증이래요.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요?'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다. 전문의가 단 답글이긴 하지만 시사평론가의 평론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가 달려있다. 힘든 마음을 인정해 주세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대상이 되어주세요. 이런 이야기들. 


 나도 우울증인 사람을 안 본 것은 아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우울증인 학생들이 많다. 본인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학부모 상담에서 부모님들이 먼저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어떤 학생이 우울증인 것을 알게 되면 첫 번째 생각은 '아, 그 반에서 말조심해야겠다.'이다. 성적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인 학생이 앉아있는데, 의욕을 자극한답시고 '야, 죽을 만큼 공부해도 안 죽어, 죽을 만큼 공부해 봤냐?' 하는 위험한 언행을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조심만 하면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지금 나자빠진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울증인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다. 심지어 학교는 자해나 자살시도를 하는 학생들도 많은데 이들에게도 이런 말과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된다거나, 이렇게 대해주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교육받지 못했다. 어디까지는 하면 되지만, 어디부터는 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위하면서도 가장 먼저 나를 지키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사범대에서도 학교 현장에서도 듣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나름의 도덕성에 기반하여 

"그래도 인생은 살만해. 힘내서 살아보자."

이런 말들만 나불댈 뿐이다. 저런 말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위안이 되는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지 알지 못한 채. 



 흐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겠지만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들은 우울증 환자 그 자신이 어떻게 해야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을 쓰지 말고, 우울증 환자의 주변인을 위한 안내서를 당장 쓰길 바란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 자녀가 우울증일 때 부모는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갖고 아이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병원도 안 간다, 상담도 싫다, 학교도 안 간다, 부모와는 말하기 싫다, 건들지 마라, 말 걸지 마라 하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부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란 말이다. 니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매뉴얼을 만들어서 전국의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무료배포하라고. 보지도 않는 학교생활기록부 매뉴얼만 악착같이 뿌리지 말고. 



 나는 내 친구와 동료와 가족들이 나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서운했다는 것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여러 번 생각해서 나를 위해 했던 언행들이 인지와 정서의 균형이 깨어진 우울증 환자에게 어떻게 왜곡되어 느껴졌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밑의 경고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에 기반한 것이다. 

 '이 인간 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꼬인 인간이잖아!'라고 생각하더라도 상관없다. 



우울증 환자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경고장.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있다면

뭘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오지랖을 좀 참아보세요.     

병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진 빠지니까,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겠지만 자꾸 캐묻지 말고 

말하는 정도까지만 들어주세요.      


‘뭐 그 정도 일로 저래?’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 기분이 당신에게도 전염될까 봐

당신에게도 스트레스가 될까 봐

진짜 고통스러운 것들은 말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어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우울증 어쩌고 하지 마세요.

나를 현대인 중 하나로 엮지 마세요.

나의 힘듦은 ' n분의 1' 아니고 전체를 나타내는 '1' 그 자체니까요. 


마음의 감기, 그 소리 좀 그만하세요.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데 

여름 감기 걸린 그 개가 지금 나니까

약도 없는 감기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 이 감기가 더 심한 병이 될지 누가 아나요. 

이 우울증이 공황이 되고

평생 약을 먹고 운전도 못하고 비행기도 못 타고 

완치라는 건 없는 병을 안고 사는 내가 될까 봐


심각해지면 죽고 싶기도 한다던데

나도 그런 생각이 들까봐 걱정이에요.

이런 걱정이 드는 게 더 걱정이에요.     


쓸데없는 걱정 한다 하겠지만 

그 쓸데없는 걱정을 끊임없이 하고 앉아있는 게 

지금 내 병의 증상입니다. 


힘들어서 직장을 쉰다고 했을 때,

병가나 휴직 중이라고 했을 때

보자고 해서 나오면

잘 나왔다고 반갑다 해주세요.

초록색이 보이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햇볕이 들어오는 탁 트인 곳으로 가서

밥이나 사주고 커피나 사주고 

콧구멍에 바람 넣고 보내주세요. 


당신도 지금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며

그래도 쉬어서 좋겠다는 소리는 아예 꺼내지도 마세요.     

가는 길에, 생각보다 표정이 밝다고 ‘멀쩡한데?’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펑펑 울 수 도 있으니까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에요. 


우울증 약은 

당신이 먹으라고 해서 먹을게 아니고

먹지 말라고 해서 안 먹을 것도 아니니까

약에 대해서는 제발 참견 좀 하지 마세요.

의사랑 내가 알아서 할게요.     



가족들이여, 

뭐라도 좀 해봐라 다그치지 마세요.

얼마나 힘들면 다 큰 어른이 

돈 버는 것도 포기하고 직장을 안 나가겠습니까.

하루종일 누워 자니까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힘들었던 기간만큼 방전됐던 시간만큼

누워서 좀 쉴게요.


괜찮냐는 친구들 카톡에 안 괜찮다고 답할 기운도 없으니까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라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이왕 쉬는 김에 뭐라도 배워라는 소리 그만하세요.

이왕 쉬는 게 아니라 

미칠 지경이라 일하는 걸 쉬는 거예요.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 하기만 해 봐요.

엎어졌는데 못 일어난다니까요.      


힘도 없다면서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지간히 많다 싶죠?

그래도 언젠가 이 글이 생각나는 날이 있을 거예요.

곧 만나실 거예요. 우울증 친구.

그만큼 많습니다. 우울증. 


-끝-



이 인간 이거 단단히 꼬였구만. '다 하지 말란 말이냐, 뭘 하란 말이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 질문에 아주 주관적인 해답 몇 개를 제시한다. 

다만 이 방법은 조울증이나 중증인 우울증에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울증이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하기를 추천합니다. 


1. 돈이나 기프티콘 보내주기

  - 나중에 기분 좋아지면 뭐라도 할 수 있음. 기프티콘으로 공짜 커피 마실 때 기분 좋음.     

  - 보내준 사람 생각이 나서 고마움. 기분 전환 되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게 됨. 

  - 환자의 사회성 향상에도 도움 됨. 

    

2. '너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그런 일은 내가 안 당해봐서 상상조차 안 간다, 야..'

  - 이 공감이 가장 와닿고 고마웠음.

  - ‘나는 그것보다 더 힘든 일 겪었다' 금지

  - '그건 별거 아니다, 내 이야기 들어볼래' 금지    


3. "나올래?"라고 물어봤는데 나온다 하면, 만나서 맛있는 거 사주기

  - 맛 못 느낄 수 있음 주의

  - 모든 음식에서 쓴 맛 날 수도 있으니 많이 못 먹는다고 뭐라 하지 말기    

 

4. 좋은 병원이나 상담선생님 있으면 소개해주기 

  -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임. 

  - 인터넷 후기 말고 진짜로 좋은 의사나 상담사를 찾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므로 답답한 부분임. 

  - 실제로 그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사람의 후기 등 병원이나 상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면 가장 고마움. 


5. 직장 동료라면- 절차적 도움 주기 

  - 휴직, 병가 등에 대한 절차나 규정, 사례 등에 대해서 아는 정보 있으면 제공해 주기

  - 메신저가 중지되었을 그를 위해 간단한 행정적인 질문을 대신 물어봐주거나 관련 담당자 번호 알려주기

  - 병원비나 상담비 지원 사업이나 제도가 있으면 안내해주기 

  - 회사에 내야 할 간단한 서류 대신 내주기 




당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계속 우울할 수도 있고, 

혼자서 방법을 찾아 잘 이겨낼 수도 있다. 

마음 썼는데, 성과가 없더라도 허무하다 하지 말고, 

그는 그 자신의 터널안에 있으니

그의 문제는 그가 해결하도록, 너무 마음 쓰지 마시길. 






다음 이야기 :  나 때문에 당신도 우울해진다면, 헤어질 결심.

+ 우울한 기분은 전염된대요

+ 우울증 친구를 챙기다가 당신의 일상도 같이 우울해진다면? 

+ 타인을 책임질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 위로와 공감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만 하세요

+ 부정적 기운에 내가 잠식당한다는 느낌이 들면,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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