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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l 25. 2024

이제 우울한 건 꼴도 보기 싫어

들러붙지 마. 나가떨어져.


처음 정신과를 방문한 이후로 넉달 가량이 지났다.


3월부터 시작되었던 불안과 고통을 따지면 1달 추가.

아이의 사춘기를 우울의 시작으로 따지자면 4년 추가.

나의 어린 시절을 우울의 근원으로 보자면 40년 추가.


어둠과 수면뿐이었던 괴로웠던 시간들이 이제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적당한 과거가 되어간다. 평생 숨어서 지낼 수도 있었던 우울이라는 것이 학교의 일로 촉발되었는지, 학교에서 발생한 일들이 거대한 끈끈이가 되어 내 모든 감정과 기억들을 다 끄집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3월에 우리 담임반의 그 학생의 일이 아니었다면, 응급실이나 정신과를 갈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정말 미칠 지경이 아니라면 참지 않았을까. 그래도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으니 모르는 일이긴 하겠다.


심리검사와 병원진료는 그 자체가 기 빨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진단서를 발급받는 것, 휴직계를 내기까지의 과정은 전부가 고통이었다. 일반적인 처방약 봉투와 달리, 병원 이름도 약국 이름도 없이 '행복하세요'라고만 적혀있는 약 봉투에서 꺼내먹는 약을 넘기는 순간들도 괴로웠다.


우울한 건 싫은데,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몸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누구에게 한 번쯤은 해보았을 말,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의 '긍정적인 생각'은 의지로는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을 먹어야 의지가 되는데, 그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 알고 있지만 딱히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상태를 느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몸이라도 움직여야지 하며 아이들이 학원에 간 시간에 동네 산책을 나가면, 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해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교복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저 학생들이랑 이제는 말도 섞기 싫은데, 다시 학교에 가서 어떻게 가르치지 하며 또 눈물을 훔쳤다. 감정의 기복은 수면의 아래위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서만 움직였다. 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조금은 덜 어두운 곳으로 가거나.





그래도. 처음부터 생각했었다.

이대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언제 끊을지도 모르는 약을 계속 먹으면서 살 수는 없어.

"저 선생님 우울증 환자래, 약 먹는대."라는 소문을 달고 다니지 않을 거야.

난 그때의 OO엄마처럼, 우리 애들 놔두고 우울증에 빠져 살 수 없어.

나는 다시. 반드시. 도망쳐야겠어. 여기서.



내가 의사를 잘못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과 약은 그냥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나처럼 남에게 의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치료도, 상담도 어렵다. 나는 내 마음을 잘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툭. 털어놓고 누군가에게 쉽게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노력했다.


애써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초반에는 엄청 힘들었다. 누구를 만나면 괜찮아 보이기 위해서 행동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표정이나 눈, 입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눈이 떨리지는 않는지, 입꼬리가 어색하지 않는지에 대해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쓰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쓰고 오니 잠깐 나가서 커피 한잔하고 오는 데도 진이 빠졌다. 집에 오면 한동안은 누워있어야 했다. 그래도 누가 불러주면 나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거리가 멀어도, 시간이 늦어도 기꺼이 갔다. 특히, 학교 사정 잘 아는 선생님들 모임에는 무조건 나갔다. 나가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왔다.


하고 싶은 것은 없었는데, 하기 싫은 것은 있었다. 하기 싫은 것은 안 했다. 예를 들면 요리 같은 것들이다. 예전에는 어제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으면 오늘은 안 시켜 먹었을 거라면, 그런 거 상관없이 요리하기 싫은 날에는 돈 상관없이 마음껏 배달시키거나 외식으로 때웠다. 청소나 집안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집이 엉망이어도 하기 싫으면 청소도 빨래도 안 했다. 과일이나 야채도 먹고 싶으면 가격에 상관없이 그냥 막 사서 먹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4만원짜리 수박도 사 먹었다. 나만 좋아하고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내 마음대로 시켜서 먹었다. 콩나물 국밥이 먹고 싶으면 혼자라도 찾아가서 한 그릇 싹싹 다 먹었다. 맘고생으로 해골이 되어보고 나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 나이에 말라빠져 볼품없는 것보다 그냥 살찌고 생기 있는 게 나았다. 살이 찌거나 말거나 음식은 다 약이라고 생각하고 막 먹었다.


딱히 엄청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틀에 한 번은 씻겠지 싶어서 수영에 등록했다. 사실 이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이틀에 한 번은 씻게 되었고, 이틀뿐 아니라 자유수영까지 가면 사우나에서 매일 씻는, 깨끗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3월 이후, 사고 싶은 옷이 없어 쇼핑을 끊었는데, 사고 싶은 수영복은 생겼다. (지금은 심하게 화려한 수영복을 사서 입고 다닌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작가가 되거나 책을 낸다거나 하는 원대한 꿈은 아니었지만, 내 이야기들을 어딘가에는 풀어야 했다. 이걸 계속 묻고 가다가는 나중에 또 언젠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엄청 읽었다. 도서관에 매일 가서 책을 수십 권 빌려오고 반납하고, 다시 빌리고 반납했다. 우울증에 대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읽었다. 우울증, 공황, 조울증, 기분장애... 나와는 상관없어도 닥치는 대로 다 빌려와 읽었다. 나는 나에게 딱 맞는 의사를 못 만났지만 좋은 의사를 만나 상담하고 나아지는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거기서 의사가 해주는 말을 적고 새겼다. 내 의사 말고 남의 의사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래도 돈도, 시간도 안 들고 내 감정 소비할 일도 없으니 더 좋았다. 마음 불편할 일도 없었다. 글쓰기 책부터 SF소설에 철학책까지, 읽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맛없는 영양제를 먹는다 생각하고 계속 읽었다. 그래서 의도한 것은 아닌데 유튜브 중독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대신 브런치 중독이 되었지만.)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내가 계획했던 것-우울증에 대한 과정과 극복의 여정-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 글에 공감을 표해주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훌륭하지도 않은 글을 끝까지 읽고 긴 댓글을 달아주는 여러 분들 덕분에 '아, 이래서 글을 쓰는구나'하는, 아직은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작은 보람 같은 것을 느꼈다. 수학 말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잘 가는 일을 찾아서 좋았다. 브런치에는 나 말고도 더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그 아픔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 행복일지 불행일지 모르겠으나 그도 나처럼 글을 쓰면서 아픔을 풀어내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하트를 누르고, 댓글도 달았다.

우울증에 관한 것만 쓰다 보니 더 우울해지는 것 같아서 아무거나 쓰는 이상한 브런치북도 만들었다. 진짜로 아무거나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글을 더 많이 읽었다. 사람들은 역시 우울한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글이 너무 웃기다는 댓글이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서서히 일어났던 일이지만 브런치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나에게는 특별했고, 소중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을까.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긴다'라는 뜻의 동병상련.

분명히 병 걸린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 옆에는 비슷한 사정의 누군가가 있었겠지.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갔을 '우울증'이나 '정신과 진료'같은 말을 이제 그냥 넘기지 못한다. 나 같은 사람을 보면 너무 불쌍하다. 사람들이 댓글을 왜 이렇게 길게 쓰나 했는데, 나처럼 답답해서 그랬나 보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동네 맘카페에서 정신과를 찾는 글을 보면 내가 갔던 정신과에 대해 정보를 알려주고, 사춘기 카페에서 정신과 진료나 상담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지나가지 못해 댓글을 남긴다.

동병상련의 정신은 무엇보다 교사커뮤니티에서 극대화되었다. 학생, 학부모 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선생님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학교 일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 선생님의 글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바보들 같았다. 당장 휴직하고 병원진료를 받아야 될 사람들이 학급 때문에, 부장이라서, 맡고 있는 업무를 그만두지 못해서, 교장선생님한테 미안해서 등등의 이유로 '어떡하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런 고민 글만 올리고 있었다. 당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학교 일은 어떻게든 굴러간다고 꼭 쉬고 병원 다니시라고 댓글을 달고 돌아다녔다.



이제는 그만 우울하고 싶다.

코끼리만 빼고 다른 것을 생각하라고 하면 자꾸 코끼리 생각이 난다는데 우울증도 비슷한 것 같다. 우울하다, 우울하다 하니 진짜 끝도 모르고 빠지게 되었다. 물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듯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없다. 우울한 감정이 바지에 묻은 마른 흙처럼 쉽게 털어지는 것이 아니라 찐득한 슬라임 잔해들이 옷 곳곳에 묻어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떨쳐내기 힘들다. 떼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들러붙는다. 더 지저분하게.




심리 검사에서 나의 방어기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승화'라고 했다.


승화(sublimation)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바람직한 목적을 추구하여 무의식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행동으로, 본능적인 에너지가 가로막히거나 분산되지 않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배출된다.   


몇 달 동안 나의 몸부림은 승화기제의 일부였나 보다.

내가 휴직하지 않았다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수영을 다니지 않았다면 아직도 침대에만 누워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내가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었나 생각해 보면, 늘 고난은 있었고, 그래도 어찌어찌 헤쳐왔다. 이제 와서 보니 악바리 같은 성격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독종 같은 성격 덕분에 살았다.



이번에도 치트키는 승화다. 가보자.













다음 이야기 :  약보다 의사보다 친구가 최고다

+ 쓰고 나니 할머니 같지만

+ 밥 사주고 커피 사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 마흔이 되니, 스무 살에 만난 친구들과 인생의 반을 보냈다

+ 동네 언니들도 친구고, 수영장의 할머니도 친구다

+ 바쁜 와중에도 징징거림과 우울한 소리를 들어줘서 고맙다

+ 서로 징징대면서 오래오래 질척거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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